매거진 습작

그대여, 나는. 다소간에 이질적으로.

by 석지호


그러니까, 오늘 하루는 굉장히 평범하지 않았는데.


1. 아침에 일어나서 적당히 요리를 하고 - 김치찌개를 하려고 김치를 볶다가 왠지 모르게 채칼이 눈에 밟혔다. 언제 사뒀는지도 모를 채칼을 한 번도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에 괜히 분노를 했는데. 아무래도 그것은 이제 겨우 빚 아닌 빚을 다 갚고 난 자가 삶의 희망은 커녕 본인 앞에 놓인 0이라는 숫자에 괜히 다시 무너져버린 그런 마음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라도 채를 썰어야 겠다는 무의미한 강박에 사로잡혀 마늘 몇 쪽을 슥 채를 썰다가 괜히 손이라도 다치면 삶이 다시 어려워지겠다는 생각에 멈추어버리고 말았다. 괜히 또 그런 상념은 내가 아프면 아프다는 것에 서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관여된 모든 돈이라는 것에 굴종하고 마는 한심함에 속한다. 하필 눈 앞에 스팸 통조림이 보였고 왠지 모르게 아주 자연스럽게 스팸을 채를 썰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김치와 스팸을 넣은 김에 치즈 한장을 더 넣고 부대찌개를 끓였는데 생각 외로 채썬 스팸은 맛이 꽤나 좋았고 이것이 그 유럽 구석 어딘가의 햄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 이름을 떠올리려고 애쓰다가 프래스코인지 슈하스코인지 하는 것이었다는 생각에 멈춰 학다리를 짚고 서 있었는데 검색해보니 프래스코는 벽화였고 슈하스코는 브라질 꼬치구이라는 것에 어쩐지 분노하고 말았다. 그래서 괜히 이 채 썬 스팸의 식감은프래스코나 슈하스코와 비슷하다라고 선언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프로슈토가 맞는 것 같다는 자괴감이 여지없이 들었다.


2.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멍하니 목욕을 하다가 - 제대로 된 욕조가 아니라 샤워 부스 안에서 접이식 간이 욕조를 사용한다는 것은 괜히 우울해지고 마는 것인데. 아무리 이 땅에 내 몸 하나 건사할 땅이 없다지만서도 그래도 욕조에서 누워 있지 못하고 적당히 쪼그려 앉아 있는 것은 여지없이 나는 잘 살고 있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또 시선은 괜히 거멓게 앉아 있는 곰팡이와 마주치는 것인데 아무리 청소를 해도 다시 살아나는 것은 그래 너도 사는구나 살아 있구나 살고 싶구나라며 너른 마음으로 이해를 하려고 하다가도 다시 무의미한 청소를 반복해야 한다는 것에 또 숨이 차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의 온도는 아주 적당했고 멍하니 있다가 물이 식어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어디로 흘러가는가에 대해 혼자 되물었다. 정답은 당연히 없었고 습기 찬 공간 속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제대로 아는 가사가 하나뿐이라 '먼 산 언저리마다 너를 남기고 돌아서는, 내게 시간은 그만 놓아주라는데 놓아주라는데, 난 왜 널 닮은 목소리마저 가슴에 품고도, 같이 가자 하지 못했나' 를 계속 반복해서 불렀다. 결국 '같이 가자 하지 못했나'만 메아리쳐 작은 공간 속에 울렸고 남아 있는 건 습기 뿐.


3. 낮잠을 자고 일어나 차를 마셨고 - 그러니까 커피가 아닌 것이다. 거진 카페인에 면역이 되어있는 내 몸은 몬스터를 마시든 커피를 마시든 사실 무언가 드라마틱한 삶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었는데. 그래도 커피를 마시는 것인 거진 습관처럼 덕지덕지 붙어있는 것이다. 사실 맛있는 커피라는 것은 내게 굉장히 모호한 것인데 다른 음식이야 맛있는 것을 곧잘 구분하고는해도 커피라는 것은 도통 모르겠는 것이다. 그래서 거의 열 번 중에 아홉 번 정도는 당연히 콜드브루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키는 것이고 그 맛은 잘 모르겠지만 어떠한 속을 쓸어내리는 시원함에 마셔버리고는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커피는 내게 어째 동치미 국물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비 오는 날에 아주 무작위적으로 카페를 가게 되었는데 그 무작위성 위에 올라와있어서인지 아무런 이유 없이 카푸치노 비슷한 것을 시켜버렸고 그 카푸치노는 굉장히 작은 컵에 앙증맞게 담겨져 나왔다. 맛은 고소했고 고소함에 놀랐고 그러니까 그것은 맛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해보니 커피도 고소할 수 있었다는 그런 자신의 멍청함에 놀라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꽤나 흥미롭지만 정신없는 대화를 했는데 머리 한쪽 구석에는 커피 말고 차를 마시고 싶다라는 생각이 계속 맴돌았고 이유는 별로 알 수 없었다. 다시 생각해보건데 아무래도 커피를 마시자는 것은 너무 도회지 가운데에서 바쁜 와중에 할 법한 소리같고 차를 마시자는 것은 어쩐지 낭만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은 차를 마셨다.


4.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을 읽었다 - 매일을 영어 속에 파묻혀 살면 괜히 한글로 되어 있는 것에 감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패드나 노트북같은 그런 더는 차가워질 수가 없는 질감을 뒤로하고 종이를 넘기게 되는 것은 왠지 아련해져버리는 것이다. 이제는 예전처럼 책을 진득하게 읽을 수 없는 것을 여실히 느끼지만 그러면서도 왠지 읽음이라는 행위는 따뜻해져버리는 것이다. 계속 읽어도 활자가 튕겨져 나오는것만 같아 몇 번을 전 페이지로 다시 돌아갔다. 그래도 카프카의 변신을 다 읽었고 무슨 의미인가 다시 생각하다가 사실 생각할 것도 없이 내 머릿속에 어딘가에서는 오늘은 글을 좀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버리고 말아버리는 것이다. 내게 무언가를 쓴다는 것은 어떤 괴리를 몇 푼 섞은 괴랄한 어쩌면 변태적인 행위에 속하는데.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내 생각을 불특정 다수나 혹은 특정 소수에게 보이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러한 우연을 잡을 기회는 사실 거의 없음에 가깝고 나는 다시금 그것을 필연으로 잡아 편지를 쓰거나 하고싶다는 충동에 빠져버리는 것인데. 사실 당신께 편지를 써도 될까요, 라는 말은 이천이십오년 오월십일일을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는 거의 말도 안되는. 그러니까 멸종해버리고 말아버린 추억보다는 역사에 가까운 종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대여 나는. 오늘 다소간에 이질적으로.

아침에 일어나서 적당히 요리를 하고,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멍하니 목욕을 하다가, 낮잠을 자고 일어나 차를 마셨고,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을 읽었다는 것이다.


있을 수 없는 하루였고, 그래서인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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