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습작

사이, 공백

by 석지호

몇 가지 문장을 조탁하는 중이었다.


조탁하다, 는 어릴 적 어떤 글에서 보게 되었는데 그 문장은 몇 번을 곱씹어봐도 기억나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뜻은 알 수가 없었고 꽤 두꺼운 사전을 몇 번을 넘겨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새길 조 자에 옥 옥자를 쓰는 단어였는데 두 번째인가 세 번째 뜻에 글을 매끄럽게 다듬는다는 뜻이 있었다. 어린 마음에 꽤나 멋진 단어라고 생각했고 그것은 아직도 변함없게 마음 한 켠에 담아두고 있다. 다만 그 단어를 쓰는 것은 젠체하는 것 같아 낯부끄러운 것이었고, 좋은 글은 아름답고 쉬워야만 한다는 그런 묘한 아집 때문에 쓸 수는 없었다.


여튼 단어와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길을 잃었던 날이었다. 문장이 끝나는 온점과 문장이 시작하는 첫 자 사이의 공백이 그날따라 넓게만 느껴졌다. 감히 뛰어넘을 수 없는 그런.


그러니, 단락과 단락 사이는 어떠한 압도적인. 사이, 공백. 그러니까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오는 무력감과 공포감. 다시는 무언가를 새로 시작할 수 없을 것이라는 어떠한 되뇌임 속에서 괜히 서운해졌다.


나는, 새로운 단락을 시작할 자신이 없다. 아니 새로운 문장조차 시작할 가망이 없다.

가끔 삶을 지나치다 보면 맴도는 생각이다. 나는, 당신의 단어와 단어 사이 그 무명의 빈 칸에 나를 욱여넣을 자신이 없다.


쓰여져 있는 것을 찍찍 그어대고 나의 이야기를 붙여넣어 써내려갈 용기는 원고지 시절에서 끝나버리고 만 것이다. 키보드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활자에는 찍찍도 없고 갈매기도 없고 동그라미도 없고 삭막하게 쓰여져 있는 백스페이스만 있는 것이다. 공간이란 없어져버리고 마는 것이고 없어져버릴 공간이란 구태여 있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것이 나는 그렇게 외로울 수가 없다.


그래도 문장은 이어져야 하고, 단락은 메워져야 하고, 책은 쓰여져야 한다.

숨을 한 켠 참아내고 단어를 이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다만 여실히 괴로운 것은 그것이 내게는 너무도 어려워져버리고 만 것인지, 아니면 당신의 글에 쓰여질 수 없음이 두려워서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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