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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지호 May 26. 2020

보고 싶음에 이유가 없다는 것만큼 비참한 일은 없었다

다 마신 커피 잔에 꽂힌 빨대를 멍하니 씹었다. 이가 아플 때 까지도 고민은 해결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적당한 이유가 없었다. 나는 당신이 보고 싶었다. 다만 당신을 볼 만한 적당한 구실을 찾아내지 못했다.


하필 방학이라 같은 수업을 듣는 것도 아니었고 근처에 사는 것도 아니라 마주칠 가능성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시험 범위를 물어볼 수도 없었고 밥을 먹자고 할 수도 없었다. 달력도 영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직 먼 생일을 축하할 수도 없었고 명절이랍시고 안부를 물을 수도 없었다. 당신과 만날 수 있는 시작점이 단 하나도 없었다. 보고 싶음에 이유가 없다는 것만큼 비참한 일은 없었다.


당신의 번호를 눌러 놓고 통화 버튼만 바라봤다. 이 버튼 하나만 누르면 당신을 들을 수 있는데도 그러지 못했다. 내가 굳이 당신에게 전화를 할 만한 건수가 하나도 없었다. 네 하루가 어땠는지 궁금했어라거나. 갑자기, 아니 요즘 종종, 아니 늘 네 생각이 나서 전화했어라거나. 이유는 정말 모르겠지만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 같은 말들을 떠올리다가 금세 고개를 저었다. 마음을 먼저 보인다는 것은 맨 몸을 보이는 것보다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전에 당신과 나눈 메시지를 다시 읽어보거나 단체사진에 함께 찍힌 당신을 보는 일이었다. 그 이상을 해낼 용기도 힘도 내게는 없었다. 그렇게 오늘도 너절한 고민만 가득 찬 하루였다. 아무래도 내일도 비슷할 것 같았다. 당신이 보고 싶을 것이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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