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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지호 Sep 22. 2020

듣지 못하는 노래가 몇몇 있다

별 다른 일은 없다만 한껏 우울함이 몰려오는 하루가 있다. 가슴 한 켠이 얹히고 눈길이 갈 곳을 잃는 그런 날 말이다. 웬만한 결과엔 상응하는 이유가 있고 적당한 해결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환부가 마음일 경우엔 이유를 구태여 찾지 않는 편이다.


내가 우울한 이유는 이미 내가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쓸데없는 믿음 때문이다. 감정을 죽이고 늘상의 얼굴로 웃는 것은 스물 중반의 나이에게는 다소 가혹한 일이다. 이전에야 이성이 감성을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내가 내 상상만큼 강하지 않다는 것을 인지했을 때부터다. 어느새부턴가 그랬다. 정확한 초침은 기억나지 않는다.

대신 감정을 재단하는 법을 배웠다. 무언가에 휘몰아쳐져 휘청거릴 때면 항상 7212번 버스를 탄다. 어떤 이유고 연유인지는 중요치 않다. 버스에 앉아서부터 노래 하나를 반복 재생한다. 그 상황에 관한 노래든 그 사람에 관한 노래든 역시 중요치 않다.


무의식적으로 하나의 노래를 들으며 광화문 교보문고에 도착해 책을 한 권 고른다. 평소에 읽고 싶었던 책일 때도 있고 순전히 겉 태가 아름다운 책일 때도 있다. 그리고 401번 버스를 타고 이태원으로 간다. 여전히 같은 노래를 귓바퀴에 얹은 채로 피자를 한 조각 먹고 평소에 입에도 대지 않던 레모네이드를 마신다. 대체로 입맛에 맞지 않아 머금다가 퉤 뱉는다. 무미건조하게 책을 몇 장 넘기다 보면 익숙한 무기력함이 온다. 그때쯤 노래를 끈다.

일종의 루틴이다. 운동선수가 징크스 없는 경기를 위해 같은 행동을 하듯 내게도 일련의 우울함을 극복하기 위한 루틴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극복하는 것은 아니었다. 적당히 꽉 포장해 나도 모르는 어딘가에 던져두는 것이다. 묶인 쓰레기는 정신 속에서 부유하다가 침잠한다. 바다와 같이 요동치다가 가끔은 불쑥 솟아오른다. 솟아오를 때마다 같은 노래를 귀에 건다. 수십수백 번 반복됐던 그 삼분 정도 되는 노래는 같은 루틴을 머릿속에서 재생시킨다. 또다시 감정은 내려앉는다.

가끔 정말 우연찮게 거리에서 가라앉은 노래를 들을 때가 있다. 자의가 아닌 타의로 재생되는 그 노래는 우울함의 시작이 된다. 또다시 노래를 귀에 걸고 검은 바다를 상상한다. 가라앉길 빌며 가라앉길 빌며 가라앉는다. 그래서 내게는 듣지 못하는 노래가 몇몇 있다. 우울한 일은 아니다. 더는 보지 못하는 인연도 몇몇 있고.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사건도 몇몇 있고. 원래 다 그런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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