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석지호 Nov 17. 2020

그녀는 예전보다 흰색에 가까웠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 이틀이 되는 날이었다. 원 없이 잠을 자고 일어나 밥을 먹었다. 대화 없는 식사는 언제나 빨리 끝났다. 설거지를 미뤄 두고 오래 씻었다. 뜨거운 물을 온몸에 뿌리며 생각 없는 시간을 보냈다. 욕조가 없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몸에 묻은 비누를 씻어내고 다시 한번 더 비누칠을 했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 내며 오늘은 무엇을 할지 고민했다. 오늘을 고민하는 것은 어색한 일이었다. 나는 늘 내일을 고민했다. 내일 만이라면 다행인 일이었다. 다음 주며 다음 달이며 다음 해의 계획을 머릿속에 적어야 했다.

인생의 일시정지를 누른 후에도 그 버릇은 오래갔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오늘만을 생각했다. 마음을 오늘에 두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후진 기어를 넣어 마음을 어제에 두면 후회만 늘었다. 기어를 올려 내일에 두면 걱정만 쌓였다. 마음의 정속 주행은 꼭 필요했다.

어디로 향할지 고민하다가 그저 정처 없이 걸었다. 열 시 정도의 동네는 조용히 분주했다. 서성이는 사람은 나뿐이었고 덕분에 기다리지 않고 갓 구운 모카빵을 살 수 있었다. 빵을 입에 오물거리며 초등학교 담장 곁을 걸었다. 문득 운동장이 참 작다는 생각을 했다. 어렸을 때는 분명히 그렇지 않았다. 나는 낡아버렸다.

낡지 않은 시절에 늘 가던 떡볶이집에 홀리듯 들어섰다. 기억 속의 아주머니가 계셨다. 그녀는 예전보다 흰색에 가까웠다. 떡볶이 1인분에 오징어튀김과 김말이를 주문했다. 그리운 냄새였다. 맛은 그렇지 않았다. 떡볶이가 바뀌었거나 내가 바뀐 것이 분명했다. 아니면 둘 다 바뀐 것일지도 몰랐다. 늘 입에 달고 살던 떡볶이는 텁텁한 싸구려 맛이 났다.


대부분을 남기고 불량식품 몇 개를 집어 계산하고 나왔다. 아폴로를 입에 물고 학교 등나무를 타고 있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보았다. 정글짐을 헤집고 다니던 아이는 재미없는 어른이 되어버렸다. 나는 늘 내가 사는 것이 하나의 문학이 되길 바랐다. 행동은 춤이 되고 말은 노래가 되어 그 모든 것을 엮어 책이 되었으면 했다. 요즘의 삶은 메마른 수필이었다. 쓸 것도 없었고 봐주는 사람도 없었다. 아이들이 뛰노는 것을 보다 보면 오늘은 희망찬 동화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멍하니 시간을 태워 재떨이에 담았다.

작가의 이전글 우울이 얼굴에 조각되어 있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