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삼요소
정식 출간 예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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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시간을 넘게 달려야 한다는 버스는 크지 않았다. 동네 태권도 학원 버스랑 크게 다르지 않은 구조였다. 기사는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서 그런지 화가 많이 나 있었다. 큰 캐리어를 두 개나 가져온 미국인과 실랑이를 벌였다. 커피를 홀짝이면서 불가리아 사람과 미국 사람이 러시아 사람의 더듬거리는 통역을 통해 싸우는 것을 보는 것은 재밌는 일이었다. 긴 불가리아어와 그보다 더 긴 영어는 머리를 박박 깎은 러시아 사람에 의해 본인 머리보다 짧은 러시아어로 바뀌었다. 덕분에 정시보다 조금 넘어서 출발했지만 불만은 없었다. 어차피 버스에서는 지루할 일 밖에 없기 때문이다.
서로 노력할 필요가 없는 사이다. 버스를 함께 탄다는 것은 그렇다. 같은 출발지와 같은 목적지를 가지지만 굳이 서로 알 필요가 없어져버리고 만 관계다. 꽤 긴 시간을 어깨를 맞대며 가야 하는데도 그렇다. 호스텔 로비에서 봤다면 어색하게나마 인사를 했을 사람들이 버스에 탔다는 것 하나만으로 아무런 말이 없어졌다. 아무런 말없이 버스는 마케도니아로 향했다. 와이파이도 없고 저장해 둔 동영상이라도 봤다간 멀미를 할 것 같아 창밖을 쳐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크게 눈길을 끌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이렇게 할 만한 것도 없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을 좋아한다. 이럴 때면 머리를 스쳐 가는 몇몇 문장들을 붙잡아 둘 수 있다. 나는 이런 것을 ‘문장 낚시’라고 말하는데 가끔 얼토당토 없이 느낌 있는 문장이 낚일 때가 있다. 하지만 보통 글은 쓰기 귀찮아서 얼린 동태 상태로 메모해 두고 방치해 둔다.
심심할 때면 녹여 양념을 넣고 편지나 수필을 쓰고는 한다. 요즘은 편지를 쓸 대상이 없어서 수필을 쓴다. 가끔 서로 편지만 쓸 수 있는 사이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요즘 세상은 편지를 쓰는 것이 꽤나 수치스러워진 세상이라 연인 정도가 아니면 쓸 수가 없다. 보내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부담스럽다. 오늘 낚은 것은 ‘명도가 낮고 채도가 높은 날이다’와 ‘강가엔 주름이 졌다’라는 문장이었다.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낚은 나도 모르겠다. 그냥 그런 생각이 났다.
여행을 할 때 나라의 이미지를 결정하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바로 유심과 택시기사와 김밥천국이다. 거창한 것이 아니다. 화려한 볼거리와 끝내주는 음식 같은 것은 모르겠다. 그런 것은 사실 세상 어디서나 운 좋으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쉽게 살 수 있는 유심과 강짜 부리지 않는 택시기사와 혼자 어색하지 않게 식사를 할 수 있는 평범한 식당은 찾기 어렵다. 그런 것은 여행이 아니라 그 나라에서 사는 것이 삶의 일부가 될 때쯤이나 되어야 편하게 접할 수 있는 것이다. 살다 보면 구글링을 해도 아무리 찾을 수 없는 작은 지혜 같은 것이 분명히 있다.
마케도니아의 수도인 스코페에 도착했다. 버스정류장에서는 유심을 살 수 있는 곳이 없어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물어봤다. 마케도니아 사람들은 친절했다. 세 군데에서 허탕을 쳤지만 지도를 보여주며 유심을 살 수 있는 곳을 손으로 짚어줬다. 심지어 잘못 들어간 전자기기 판매점에서는 여기서 가깝다며 함께 걸어가 주기도 했다. 도착한 곳이 유심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구점이라는 게 문제였다면 문제였다. 전자레인지 파는 사람과 크레파스 파는 사람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어딘가에 몇 번 전화를 하더니 답을 알려줬다. 팔게 없는 사람은 그냥 단순히 고마워할 수밖에 없었다. 엄청 기쁜 표정으로 유심을 샀고 사는 김에 마케도니아어를 조금 배웠다. 여전히 필요한 말은 세 가지뿐이었다.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두 시간 정도를 유심을 사는데 날리고 다시 버스터미널로 돌아갔다. 저 멀리서도 나를 지켜보는 게 느껴졌다. 하긴 캐리어 하나 질질 끌면서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돌아다니는 동양인은 딱 택시 가격으로 등쳐먹기 딱 좋은 것이다. 늑대들이 택시를 외치며 다가왔다. 양은 한 마리였다. 그리고 양은 조금 어딘가 나사가 빠진 것 같았다.
“알렉산드리아 광장! 얼마예요!” 내가 영어로 외쳤다. 택시 기사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려 애썼다.
“알렉산드리아! 데나르!” 다시 한번 외쳤다.
광장이 마케도니아어로 알 수 없었다. 얼마인지 묻는 표현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마케도니아 화폐 단위를 외쳤는데 어쨌든 의미는 전달된 것 같았다. 이 무식한 방법은 돈 없는 새내기 시절 속초 회 시장 어딘가에서 외쳐보고 나서부터 세계 여기저기서 써먹은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참고로 속초에서는 서로 경쟁하는 상인들 덕에 값싸게 광어를 먹을 수 있었다.
마케도니아 택시 기사들은 서로 앞다투어 경쟁하지 않았다. 오는 걸음을 멈추고 사람 좋게 웃었다. 미리 검색해 본 가격보다 훨씬 싼 가격이었고 심지어 한 명은 안에 있는 미터기 비슷한 것을 보여주며 괜찮다고 웃었다. 그 미터기를 켜고 간 것이 아니긴 했지만 어쨌든 잘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마케도니아가 굉장히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호스텔 근처에는 김밥천국이 많았다. 비싸지도 않고 혼자서 들어가기 부담스럽지도 않고 예의를 크게 차릴 필요도 없고 사람도 너무 많지 않고 심지어 그 나라의 음식을 자연스럽게 먹을 수 있는 곳. 딱 김밥천국 같은 곳이 나처럼 여행하는 사람들에겐 너무나 귀한 존재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 맛집을 검색하면 딱 봐도 부담스러운 레스토랑이나 찾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차이나 덤플링’이나 ‘이탈리안 피자’를 먹기엔 조금 그렇지 않은가. 간판이 다 떨어진 식당에 들어갔다. 음식을 고르면 아주머니가 그릇에 담고 무게를 따져서 값을 매기는 것 같았다. 마케도니아 음식을 달라고 했다. 아주머니는 몇 개를 손으로 가리켰고 나는 콩과 닭으로 된 음식을 골랐다. 선택은 완벽했다. 아주머니에게 손가락 따봉과 함께 같은 음식을 한 번 더 부탁했다. 완벽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