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의 용서, 이해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 사람이 겪은 일을 나는 겪어보지 못했는데 온전히 그 마음을 헤아려 받아들이는 것을 말이다. 그것이 가장 가까운 가족일수록 우리는 한 사람을 이해하려는 마음 앞에 오롯이 서 있기 어려울 거라 생각한다. 가장 가깝기에, 더 이해하기 어려운 그런 상황에 놓인다면 말이다.
저울의 양 끝, 그릇에 담겨 기울어지지 않은 채 같은 마음의 양으로 그 사람을 바라볼 수 있을까?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중 모자 지간인 옥동(김혜자)과 동석(이병헌)을 보며 ‘이해’라는 단어를 깊이 생각해 보게 된다. 동석은 옥동을 미워한다. 나는 동석이 표현하는 그 ‘미움’의 표현이 때로는 어린아이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자신이 혹여 엄마를 용서하게 될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들킬까 더 못되게 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옥동은 동석의 그런 행동에도 화 한 번 내지 않으며 동석이 모질게 구는 모든 행동과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아니, 내 눈에 그녀는 조금 지쳐 보였을지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의 첫 시작엔 ‘가족’이 있다. 그런 그녀에게도 가족이 있었지만 그녀의 삶에 가족은 모두 죽음의 끝으로 가고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마주해야 했던 가족의 죽음보다 그녀를 더 괴롭혔던 건 아마 살아가야 할 생 앞에 남겨진 자식이 더 눈에 밟혀서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남은 자신의 아들 동석을 어떻게든 배 곪지 않게 키워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남은 아들을 지키는 방법 중 가장 안전한 선택지였을 것이다. 그녀의 그런 선택은 아들 동석이 이해하기엔 어려웠겠지만 그녀는 아들의 이해보다 죽음을 피해 살아야 할 아들의 인생이 우선이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그녀는 동석이 돌아가자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마저 놓친다면 그것이 지금의 아들 손이 아니라 명(命)이라는 것을 직감했기에.
반대로 동석은 젊었고 패기 넘치는 남자아이였다. 사회의 구조를 이해하기엔 어렸지만 그의 말대로 어쩌면 엄마와 둘이서도 잘 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가난이 그에게 있어 별것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엄마는 자신의 뜻을 이해해 주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결국 그가 받아들여야 했던 상황은 누군가의 첩의 자식으로, 이복형제로부터의 괴롭힘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지 않던 엄마를 마주해야 했던 상황이었다. 그는 가장 이해받고 싶었던 사람에게 이해받지 못했고 이해하고 싶었던 사람에게 뺨을 맞아야만 했다. 동석은 그런 옥동이 야속했을 것이고 그렇게 둘은 서로를 이해하지도, 이해받지도 못한 채 어른이 되고 나이가 들어가야 했다.
나는 그런 두 모자지간을 보며 우리 할아버지와 아빠 생각이 났다. 할아버지와 아빠 역시 옥동과 동석처럼 감정의 골이 꽤나 깊은 사이였다. 아빠는 술만 마시면 전화를 해댔고 그런 아빠의 행동에 할아버지는 역정을 냈으며 그 화는 전화기의 선을 뽑고 날카로운 말들을 내뱉는 것으로 끝이 났다. 반복되는 그런 상황이 올 때면 방 안의 공기를 옥죄는 것 같았고 나는 그런 두 사람이 왜 그리 싸워야 하는지, 왜 좀처럼 나아지질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그런 이해보다 어린 나이의 나는 그저 그런 상황이 빨리 지나가길 바랐으며 내가 짊어져야 했던 상황을 이해받고 싶을 뿐이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그 무언의 침묵 앞에, 이해를 바라는 이들 앞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오늘도 침묵, 의도된 무지였다. 내가 그리 산 시간의 합인 스무 해보다 더 많은 그 두 사람의 해(慀:마음이 편치 않을)도 아빠의 죽음 앞에 끝이 나버렸다.
할아버지는 끝내 아빠를 이해하지도, 이해해주지 못했다. 물론 아빠도 마찬가지였지만. 나는 아빠와 할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서로의 이해받지 못한 것들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하려 노력한다.
어쩌면 두 사람의 삶은 ‘옥동’과 ‘동석’처럼 각자만의 기구한 삶이 서로가 이해받기엔 너무나 어려웠던 거라고, 그래서 두 사람 역시 그러했을 거라고. 그러는 한편 내가 할 수 있는 이 ‘이해’는 내가 받아들이기 쉬운 쪽으로 단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동석이 옥동이 끓여준 된장찌개 한 숟갈과 흰 밥을 먹다 잠든 옥동이 숨을 쉬지 않는 걸 확인한다. 동석은 옥동을 끌어안으며 이제야 그녀를 진정으로 이해했음을 깨닫는다.
사랑한단 말도
미안하단 말도 없이
내 어머니 강옥동 씨가
내가 좋아했던 된장찌개 한 사발을 끓여놓고
처음 왔던 그곳으로 돌아가셨다.
죽은 어머니를 안고 울며
나는 그제 서야 알았다.
난 평생 어머니 이 사람을 미워했던 게 아니라
이렇게 안고 화해하고 싶었다는 걸.
이렇게 오래 안고 지금처럼
실컷 울고 싶었다는 걸.
동석의 이 말처럼 할아버지와 아빠의 오래된 벽도 그곳에서는 허물어져 있진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어쩌면 살아생전에 해내지 못한 두 사람의 이해와 화해도 결국은 저 죽음 너머에서는 이루어진 건 아닐까? 그리하여 오래 안고 실컷 울며 남은 평생을 서로 사랑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