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가 내 곁을 떠난 지 벌써 4년이 되었다. 첫눈이 펑펑 내린 다음날, 온통 새하얗게 변한 세상을 등지고 강아지는 마지막 여행을 떠났다.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도 없고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이 아연해지는 느낌이었지만 아주 곱게 떠났다는 장례지도사님 한 마디로 빈자리에 시간들을 버텨낼 수 있었다.
강아지를 작은 유골함에 담아서 오는 길은 여전히 추웠고 가로등불 하나 없는 어두운 밤이었다. 하얗던 세상은 온통 어둠에 삼켜졌고 다시금 환하게 빛나려면 말 그대로 시간이 필요했다. 잠들었던 해가 다시 떠오르기까지의 시간.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도 잠시나마 내려앉은 안개 같은 어둠이 자연스럽게 물러날 때까지 각자만의 애도의 시간들이 필요했다.
나는 하얀색을 좋아했다. 이왕이면 흰색 티셔츠를 사고, 이왕이면 무늬가 많은 것보다 단조롭되 하얀색 물건을 좋아했다. 사람 얼굴도 이왕이면 밝고 깨끗한 게 좋았고, 나 또한 그런 모습이 되고 싶었다. 내가 오랫동안 물들지 않는 본연 그대로의 '바탕색'을 좋아했던 건 나의 기질 때문이 아닌 '강아지' 때문임을 뒤늦게야 서서히 인지하게 되었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성인이 되어 진정한 어른이 돼 가는 과정까지 겹겹에 시간들 사이사이를 메꿔준 건 언제나 강아지였다. 강아지는 늘 내 곁에 존재했다. 정말로 변하지 않는 '바탕색'처럼 변함없는 모습으로 있어줬다. 나이가 들면서 새하얀 털의 윤기가 사라지고, 얇아지고 빠지기는 했지만 강아지는 여전히 하얗고 깨끗했다.
강아지가 오랫동안 지켰던 자리에 이제는 고양이가 머무르고 있다. 투명했던 호수 위로 잉크 한 방울이 떨어진 것처럼 서서히 붉게 물들었다. 맑은 하늘을 진한 노을이 뒤덮은 것처럼. 지나간 세월만큼이나 농익어 버렸다.
나는 이제 하얀 강아지보다 노란 고양이에게 시선을 뺏기는 사람이 되었다. 나의 물건들은 주황색으로 물들어 갔고 온갖 아이템에는 고양이에 흔적이 있었다. 이제 누군가가 동물에 대해 물어보면 '강아지보다는 고양이'를 외치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강아지는 속절없이 내 마음속에서도 유유히 떠내려가야만 했다.
분명 내 세상이 온통 강아지로 가득했던 때가 있었다. 몸이 좋지 않아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던 초등학생 시절, 심심하고 외로울 때면 강아지를 안고 말을 걸거나 같이 낮잠을 청하곤 했다. 가끔은 뒷산에 산책도 가고 친구들에게 강아지를 자랑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나의 하루가 강아지로도 벅차고 충분했던 때가 있었다.
내가 다시 순백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사진'을 통해 '추억'을 애써 들추며 조금이나마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느껴보려고 애썼다. 사진 속에 박재되어 있는 강아지는 언제나 그랬듯 오뚝한 코와 아련한 눈방울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뭔가 원하는 게 있을 때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낑낑 대던 모습. 이내 반응이 없으면 풀이 죽고는 이불 위에 몸을 웅크리고 잠을 청하던 행동. 새근새근 자고 있는 강아지에게 얼굴을 묻고 킁킁거리면 항상 내 코를 자극하던 꼬순내. 가만히 머무르다 보면 이내 느껴지는 작고 소중한 온기.
이별 후에도 사진과 추억만 또렷하다면 언제든지 보고 싶은 마음을 털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모니터 속에만 존재하는 강아지 모습에는 내가 가장 사랑하던 강아지의 냄새와 온기 그리고 촉감이 없었다. 곱슬끼가 유독 심했던 목덜미 털을 손으로 만지는 걸 좋아했는데, 고소미 가득하던 발바닥 냄새는 늘 헤어 나올 수 없을 만큼 좋았는데, 항상 이불 위에 포근하게 누워있던 강아지를 껴안으면 가장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는데.
강아지가 떠난 날, 모든 가족들이 퇴근하고 돌아오기 전까지 몇 시간 정도 강아지 곁을 지켰었다. 늘 강아지가 누워있던 소파 구석자리에 항상 덮고 있던 이불로 감싸주고 편안하게 눕혀놓았었다. 그 모습을 몇 시간 동안 가만히 지켜보자니 강아지가 잠든 곳이 이곳인지 그 너머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끝내 나의 이성을 놓게 한 건 강아지에게서 냄새와 온기가 모두 사라졌을 때였다. 그때 처음으로 강아지가 나와 같은 곳에 없음을 마음으로 느꼈다. 이제 다시는 서로 눈을 마주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나는 강아지와 이별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