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의 일이다. 학원에서.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느낌상
좀 말도 안되는 양의 영단어를
말도 안되는 시간 안에 외워서 시험을 봐야했던가 했을 것이다.
도무지 말이 안되었기 때문에 의욕조차 생기지 않을정도로.
아마 몇 개 이상 틀리면 손바닥을 맞아야했던가 그랬다.
그런데 상황이 이랬다.
공부를 하라고 자습시간을 준 직후에,
선생님이 시험을 보라고 시험지를 나눠주고는
바쁜 일이 있으셨는지 자리를 비우셨던 것.
차라리 혼자였다면 안그랬을 것 같은데
친구가 있어서 좀 용감해졌던 것 같다.
당시 나는 그 친구와 비행청소년?이 떠올릴 법한 일을 곧잘 했었기 때문에 더.
자습을 땡땡이 치고 근처 문구점에 가서 구경을 한다던가
만화책을 빌려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열심히 봤다던가 하는 정도였지만.
나도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 '도무지 말이 안되는 시험'에 대해
'도무지 매를 맞고싶지 않은 마음'을 살짝 감추기 위해
공감대를 일으키면서 일종의 합리화를 하고싶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이 교묘한 마음은 허세부리기로 나타났고
나는 이, '말도 안되는 시험'에 대해 마구 투덜거리며
시험이라는 상황 자체를 부정하려고 했다.
왠지, 그렇게 우겨도 될 것처럼
상황이 정말. 너무. 자유로웠다.
시험지와 함께, 시험지를 받기 직전까지 보던 영단어 프린트물도 가지고 있었고
선생님이 안계셨기 때문에 지금이 자습시간인지 시험시간인지 분간도 잘 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사실은
매를 맞는게 정말로 싫었던 것 같다.
그런데 현실은.
영단어를 그렇게 많이 외우지 못해서
시험지에 나와있는 단어의 뜻을 거진 알지 못했던 것.
나는 잔뜩 허세를 부리면서
(이게 무슨 시험이야, 그렇지않아? 너무하잖아. 라는 동의를 친구에게 구해가며)
영단어 프린트물을 슬쩍 슬쩍 보기 시작했다...
사실상 대놓고 보는 수준이었다.
이것이 시험이라는 상황이 주는 압박에 양심상
살짝씩 프린트물을 들춰서 실눈으로 훔쳐보는 형식?을 취하긴 했지만.
또한 으레 시험이라는 것이 그렇듯
시험범위가 영단어 1000개라면 시험에 나오는 문제는 50개 정도 수준이었기 때문에
나는 프린트물을 이리저리 뒤져가며 시험에 나온 영단어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야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순탄치 않은? 과정을 거쳐 시험문제의 답을 하나씩 프린트물에서 찾아내서 적는 일은
생각보다 성취감이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나만 하기가 좀 뭣해서
친구를 부추겨서 같이 컨닝을 하자고 꼬드겨대면서
점점 당당하게 베껴댔다.
그 많은 양의 영단어를 다 외워서 시험을 쳐야했다면
주어진 시간이 빠듯했을지 몰랐지만
바로 옆에 답안지를 두고 베끼는 일은 비교적 빨리 끝났다.
나중에는 너무 많이 베낀 것 같아서 몇 개를 일부러 틀리게 적는 과정마저 거쳤다 ...
시작은
어차피 못외운거 중간이라도 해서
매 맞는 일만은 피하자 였는데.
시간이 지나 선생님이 오셔서 채점을 해주셨을 때
나와 친구의 점수가 거의 상위권이 나와버렸다.
그 와중에 내 점수는 거의 1,2등을 다퉜다.
순간 너무 부끄러워졌다...
그저 베껴서 낸 시험이었기 때문에.
내 실력의 결과가 아니었기 때문에.
정당하게 공부해서 친 시험의 결과였다면
힘든 시험이었던 만큼 높은 등수를 차지하게되어 그저 기뻤을텐데.
공부를 많이 하지 못했기 때문에 진짜 실력이었으면
하위권이어야 했을텐데.
열심히 공부해서 정당하게 시험을 치른 다른 친구들에게도 너무 미안했다...
그저 학원에서 공부를 시키기위해 치렀던 영단어 시험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시험을 치고 결과를 알려주고 끝났던, 별로 중요한 시험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 때 느꼈던 부끄러움이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슴저리게 기억이 난다 ...
쉽다는 게 무섭다.
쉽게 베껴서 시험지에 답은 적는데
그건 내 것이 아니다. 내 실력이 아니다.
그런데 시험지에 답을 적고나면,
그게 마치 내 실력인 것처럼 착각하기가 너무 쉽다.
저작권 생태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도
이 이야기에서 시작해보면 어떨까 싶다.
당장의 편리함에 눈이 멀어서,
너도 나도 시험지에 베낀 답을 적는다면
시험 제도는 의미를 잃고,
누구도 공부하려하지 않는 세상이 되고 말 것이다.
저작물은 저작자가 머리로 낳은 자식(Brain-Child)이라고 할 정도로
저작자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저작인격권'이라고 한다)
이처럼 창작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영혼을 갈아넣어 만들어낸 창작물에 대해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그저 손쉽게 소비하려고만 한다면
그 누구도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려하지 않을 것이다.
저작권이 보호하는 영역은 '창작성'이지, '노력'이 아니다.
시험지에 베낀 답을 적기위해 영단어 프린트물을 뒤적거렸던 '노력'이
영단어를 외워서 시험문제를 푸는 '실력'과 다르듯이.
그저 '아이디어'도 저작권의 보호를 받는 대상이 아니다.
그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형성된 '표현의 형태'가 창작물로서 저작권이 인정된다.
맞는 비유는 아닌 것 같지만, 영어 단어를 보기만 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외운 것을 시험을 쳐서 점수로 확인해야 '실력'을 알게되듯이
'세상 밖으로 나온 아이디어'가 저작권을 갖게되는 것이다.
이렇게 한 개인의 '사상 또는 감정'이 들어간 창작물만이
재산적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저작권의 영역에 들어간다.
사람마다 고유의 생각과 가치관이 있다. 내가 다른 이의 삶을 살 수 없듯이,
이는 베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저작권에는 '저작재산권'이라는 재산권이 포함된다.
이는 타인에게 팔거나 빌려주어 재산적 이득을 취할 수도 있다.
가상화폐며, NFT라고하는 가상토큰 등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재산적 가치가 있는
가상의 자산이 확립되어가는 이 현대 사회야말로,
저작권의 생태계가 이 사회에 익숙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인식의 틀이 마련된 시기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에게,
도래하는 시대에 걸맞는 의식이 준비되어야하는 때가 된 것 같다.
창작물이 지닌 가치를 제대로 인지하고 존중하는 문화가 형성이 되어야,
저작권이 의미를 갖고 그 생태계가 이 시대에 잘 정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인식의 기반 위에서야 비로소 새로운 르네상스 시대가 꽃피울 수 있게되지 않을까.
그렇게 도래한 시대가 가져올 기발한 아이디어들의 대잔치는 또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게될까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