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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줴줴글로벌 Oct 03. 2020

40대가 되더라도 꿈을 쫓아갈 자유

낯선 타지에서의 새로운 식구 나미 언니, 그리고 싱가포르




벌써 세번째 이사였다. 남의 집에 방하나 빌려서 사는데도 70~100만원은 주고 살아야하는 싱가포르에서 더부살이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스튜디오 아파트에 혼자 사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월급의 반 정도는 낼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 싱가포르에 사는 외국인 직장인의 현실이다. 주변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관리하는 전세계 회사들의 동남아 지역본부가 몰려있는 도시 답게 주재원들도 많이 나와있다. 그들은 회사가 제공하는 한 달에 수백만 원은 하는 수영장과 헬스장이 딸린 콘도미니엄 시설에, 마찬가지로 회사가 제공하는 자동차를 몰거나 했지만 어디까지나 일부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첫번째도 두번째 집주인도 독신 여성이었는데 세입자에게 외국인에게 방을 빌려주는 것으로 생활비를 충당했다. 두번째 모두 쫓겨난 이유는 집 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고 요리를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싱가포르는 외식 문화를 가지고 있어서 삼시세끼 호커센터라고 불리는 푸드코트에서 밥을 사먹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세입자는 요리를 하지 못한다는 조항을 집 계약 시에 일반적으로 찾아볼 수 있었다. 가뜩이나 싱가포르의 음식이 입맛에 안 맞기도 하거니와 호커센터에서 계속 밥을 사 먹기는 힘들었다. 사람들은 먹고 남은 트레이를 청소부가 처리하도록 방치했는데 호커센터는 야외에 있는지라 옆에는 비둘기가 날라와 음식물을 쪼아 먹기에 바빴고, 나는 그 모습이 불결하게 느껴지곤 해서 곧잘 입맛을 버리곤 했다. 그런데도 싱가포르가 외국인이 가장 많이 방문한 도시 5위에 뽑혔다는 건 의외이다. 



마리나베이로 상징되는 현대적인 건물들, 영국 식민지 시대에 지어진 성과 같은 영국풍의 멋들어진 건축물 만을 일주일 내로 둘러보며 떠나는 게 일반적인 싱가포르 관광객의 코스이니까 싱가포르의 이면을 보기는 힘들 것이리라.  호커센터도 처음 오는 관광객들에게는 진귀한 관광 거리 이겠지만 싱가포르를 생활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거주자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인터넷으로 괜찮아 보이는 집을 발견하고는 담당 부동산 에이전트에게 연락을 해줬다. 사진으로 보던 것과는 달라서 계약을 주저 하자, 집 주인에게 받는 소개비로 먹고 사는 부동산 에이전트는 초조해 보인다. 잠시 망설이더니 괜찮은 집이 한 군데 있다며 가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도착한 곳은 퀸즈타운에 있는 신축 HDB이다. HDB는 Housing Development Board라는 이름을 가진 곳인데 흔히 로컬들 사이에서는 공영 아파트를 부르는 말이다. 특징이라면 수영장과 헬스장이 딸리지 않은 주거시설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외국인 사이에서는 콘도에 사는지 HDB에 사는지, 그리고 위치는 어느 곳에 있는지에 살아서 심심치 않게 서로의 부의 수준을 짐작하고는 편 가르기를 했다. 콘도보다는 HDB가 저렴한 가격 이라고는 하지만 오늘 둘러본 집은 방3개 짜리의 일반적인 30평대의 집인데도 7억을 호가한다고 했다. 집 주인 안드리는 첫 대면 인데도 자신의 배경을 숨기지 않았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출신이고, 대학은 영국에서 졸업했으며, 한국인 여자친구가 있었다고 했다. 알고 보니 사람들과 처음 만날 때면 하는 의례적인 과시적 인사말이었다. 영국 역시 비싼 집값으로 플랫쉐어에, 집에서 요리하는게 일반적이라서 그런지 안드리는 내가 만약 집을 렌트 하게 된다면 요리를 하는 등 자유롭게 쓸 수 있다고 해서 계약을 결정했다. 


그 전의 집들에서 집주인과 세입자 라는 상하 구분이 분명 했다면, 안드리네 집에서는 조호바루에 살았을 적 라이언과 미셸 부부 때와 마찬가지로 친구처럼 동등하게 지낼 수 있었다. 가끔 인도네시아에서 부모님이 오시기 때문에, 부모님이 쓰실 방을 제외하고는 또다른 세입자를 구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기왕에 세입자를 구하는 것이라면 같은 여자 분에 한국인을 구하면 안심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안드리에게 괜찮다면 온라인 한국인 커뮤니티를 통해서 사람을 찾아도 될지 제안했다. 안드리는 동남아시아에서 한국인의 인기를 실감하게도 또 다른 한국인 세입자를 들이는 것을 대 찬성 했다. 싱가포르의 대표적인 온라인 한국인 커뮤니티인 '한국촌'을 통해서 집 광고 글을 올리자 금새 두 명에게서 연락이 왔다. 처음 집 뷰잉을 온 사람은 40대 여성인데 한국어 선생님으로 일하고 계신다고 했다. 선생님이라는 직함에 맞게도 상냥한 인상의 분이었는데 결국 직장과는 거리가 있다는 이유로 뷰잉 후에는 연락이 없었다. 


 

다음으로 집 뷰잉을 온 사람은 마찬가지로 40대 여성인 나미 언니였다. 나미 언니는 앞서의 여성분과 비교해서는 '남성스럽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싱가포르에는 잡 오퍼를 받아서 막상 온 지는 일주일이라고 했었나. 임시 숙소인 창문 하나 없는 비싸지만 싸구려 호텔을 나오기 위해 급하게 집을 찾고 있었고, 큰 망설임 없이 계약을 결정했다. 나미 언니도 나처럼 직감에 따라 결정하는 타입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미 언니, 안드리와 살게 되면서 나의 쓸쓸했던 싱가포르 생활에서 새로운 장이 열리려고 하고 있었다. 




 





<나의 또다른 고향 퀸즈타운>

싱가포르에서 3년 가까이 살면서 내 삶의 무대가 된 곳은 퀸즈타운 이었다. '여왕의 동네'라는 재미있는 이름이 붙은 곳. 1946년부터 1963년까지 영국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싱가포르가, 1952년 처음으로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공공주택이 세운 위성 동네라고 한다. 그리고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를 타서 '여왕의 동네'라는 이름이 붙였다고 한다. 



그런 역사를 반영하듯이 퀸즈타운은 콘도미니엄 시설 보다는 오래된 HDB 건물이 많았고, 은퇴한 노인들을 많이 볼 수 있는 동네이기도 했다. 노인들은 동남아에서 데리고 온 필리핀 가정부의 부축을 받으며 아파트 앞에 있는 작은 운동 시설에서 가벼운 운동을 하곤 했다. 퀸즈타운을 선택한 것은 단순히 회사가 퀸즈타운에 있어서였다. 어떤 기업가 분의 책을 보니 젊은 시절에는 집을 직장 가까이에 잡도록 하고 단축된 이동 시간에 자기계발을 위한 시간으로 삼도록 하라는 말을 실천한 것이었다. 그런 탓에 집과 회사를 오가는 나의 출퇴근 시간은 왕복 30분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퀸즈타운에 사는 최고의 장점이라면 주롱웨스트(Jurong West)나 앙모키오(Ang Mo Kio)와 같은 서쪽 혹은 북쪽이 아니라 도심부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버스로 30분이면 CBD(Central Business District) 라고 불리는 세련된 오피스 빌딩이 몰려 있는 래플즈 플레이스(Raffles Place)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서쪽이나 북쪽에 살면 도심부와는 멀어짐과 함께 집세도 저렴 해지는 지라 방글라데시, 인도 출신으로 대표되는 저임금 노동자가 많이 몰려서 살다 보니 동네가 시장 바닥과 같은 너저분 함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퀸즈타운은 싱가포르에서는 흔한 쇼핑몰이 크게 들어선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살기 위한 집들과 은퇴자가 가득한 터라 언제나 조용하고 평온한 우리 동네를 좋아했다. 


 

나의 생활 루틴은 심플했다. 아침 7시가 넘어서 간신히 눈을 뜨면 8시 30분까지 회사에 도착한다. 퀸즈타운이라고 해서 꼭 주택가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현대, 아우디, 도요타 같은 굵직한 자동차 회사의 전시관이 위치해 있는가 하면 내가 다녔던 일본계 기업도 있었고, 이케아도 있고,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같은 아이티 회사들이 밀집해 있는 작은 실리콘밸리와 같은 산업단지가 있기도 하다. 점심은 집에서 가져온 도시락을 챙겨서 먹거나 혹은 회사 근처에 있는 호커센터에 가거나 했다. 회사 근처에는 호커센터가 크게 두 군데 있었다. 

 


내가 즐겨 찾던 곳은 한국식 혹은 일본식 정식을 판매하는 곳, 혹은 이코노믹 라이스라고 해서 밥에 몇가지 반찬을 골라서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이 이코노믹 라이스에는 가장 동북아시아 사람 입맛에 맞는 음식을 팔기에 언제나 일본인 주재원 분들이 줄지어 있곤 해서 그곳에서 눈인사하곤 했다. 



그러다 어느새 현지 음식에도 익숙해진 나는 페라나칸식 국수 요리인 '락사',  '치킨라이스', '용타후' 같은 요리를 즐기며 중국어로 "따빠오(打包, 테이크 아웃을 뜻하는 말)" 를 해달라고 요구하는 등 현지화가 되어갔다. 더불어 처음에는 미국식 억양을 흉내 낸 코리언 액센트의 영어를 가지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싱가포르 식 억양에, 현지인들과 대화하면서 익힌 중국어, 말레이어 등을 영어에 섞어서 쓰기 시작하면서 나는 점점 더 싱가포리언처럼 변화하고 있었다. 

 


5시반에 정시에 퇴근하면 6시에는 집으로 도착하곤 했다. 싱가포르는 특이하게도 8시부터 일이 시작되는 회사가 일반적이었다. 본사가 있는 한국/일본과는 1시간의 시차가 있기 때문에 본사와 시간을 맞추는 측면도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고, 동남아국가이다 보니 더위가 맹렬 해지기 전에 하루를 서둘러 시작하려는 의도도 깔려 있을 것이다. 싱가포르의 초등학교는 더 극단적이라, 오전 7시 15분까지 등교하며 7시 30분에는 학교수업이 시작된다. 저학년은 1시경, 고학년은 2시경에 수업이 마친다고 하니 어린시절부터 아침 일찍 일어나 생활하는게 익숙한 싱가포르 사람들이다. 



싱가포르에서는 야근이라는 문화가 없기에 회사 퇴근 후에는 저녁을 요리하는 등 저녁 시간을 온전히 나를 위해 사용할 수 있었던 게 가장 행복했다. 한국에서는 직장생활을 1년 정도 밖에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야근으로 점철된 한국의 직장 생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최근에는 싱가포르도 가속화 되는 국제경쟁으로 인해서 야근을 하는 분위기, 정규직이 아니라 계약직을 많이 뽑는 식으로 직업 시장이 흔들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저녁이 있는 삶이 여전히 싱가포르에서는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40대가 되더라도 새로운 꿈을 쫓아갈 자유>

저녁을 챙겨먹고 나서는 나미 언니와 함께 운동 삼아 근처의 산책로에 가곤 했다. 산책로의 이름은 "텔록 블랑가 힐 파크(Telok Blangah Hill Park)" 였다. 남희 언니가 알려주기 전까지는 사실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곳이었건만 싱가포르 내에서는 유명한 공원이었다. 싱가포르는 산 다운 산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유독 산 타기를 좋아하는 한국 사람에게는 아쉬운 감이 있다. 



그나마 텔록 블랑가 힐 파크가 얕은 언덕 수준이기는 하지만 산 타기에 대한 욕구를 해소할 수 있는, 왕복 1시간 내외의 장소였다. 산 정상에 오르면 간신히 서로의 얼굴만을 볼 수 있는 분위기 좋은 노란 조명들이 설치되어 있고, 도시의 야경을 한 눈에 볼 수 있기 때문에 밤이면 데이트를 하러 온 젊은 커플들, 사진 촬영을 나온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같이 저녁에 산책을 다니면서 남희 언니와는 참 많은 대화를 나눴다.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하면서 40대 미혼 여성으로 한국에 사는 것의 힘겨움을 느낄 수 있었다. 30대 까지만 해도 이직에는 문제가 없었는데 40대에 일을 그만두고 다시 일을 찾으려 했을 때 수개월이 지나도 연락이 오지 않는 일을 처음 겪어봤다고 했다. 그러던 차에 오래 알고 지낸 한국 동생으로부터 싱가포르의 일을 소개 받고 오게 된 것이 싱가포르까지 오게 된 배경이었다. 



한국에서 있었을 때에는 왜 결혼적령기를 훌쩍 넘겨서도 결혼하지 않는지에 대한 질문을 곧잘 받았다고 했다. 그런 질문을 받는 것도 한 두 번이지 개인간의 선을 넘은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느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아직 30대 초입에 서있기 때문에 결혼에 관한 사적인 질문들을 받거나 직장 구하기의 어려움을 절절히 느낄 나이는 아니지만, 언니의 모습은 한국에서 계속 살아가게 된다면 겪게 될 나의 미래이기도 했다. 



문득 되돌아보면 한국 사회의 젊은 사람 선호 현상은 사회 곳곳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식당을 가든 백화점을 가든 안내를 해오는 사람은 젊은 사람들이고 중 장년 층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이렇게 글을 쓰자니 한국에서 회사에 다녔을 때 상무님이 해주셨던 말씀이 생각난다. 법학부를 나왔다는 내 말에 법학부 나온 애들은 사회에 불만 가지기 쉽다는 말씀을 해 주셨었는데. 어쩌면 사회를 삐딱하게 바라보는 나의 나쁜 버릇 일지도 모르겠지만 20대 후반에 취업하고 40대에는 퇴직 당한다면, 실질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시기는 30대 때의 10년뿐. 왜 이렇게 한국에서의 삶이 각박하게 변한 것일까. 

 


사회에서 20년간 산전수전을 다 겪은 언니는 사회 초년생인 나에게 좋은 말들을 많이 해줬다. "지금은 싱가포르에서의 삶이 물가 대비해서 삶의 질이 떨어져서 힘들지도 모르지만 나중에 봤을 때에는 남들보다 스타팅 포인트가 빠를 것이라고 생각해" "괜히 후진국에 갈 생각하지 말고 경력 쌓아서 유럽이나 미국에 갈 생각을 해" "돈 조금 더 준다고 해서 중소기업으로 옮길 생각을 하지마. 베트남 같은 개발도상국에 이직하면 바로 매니저급으로 채용 돼서 좋다고 생각하는데 길게 봤을 때 좋은 게 아니야. 그 매니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거든. 큰 기업에서 일하고 또 선진국에서 일하면 비록 당시에는 하는 일이 아주 작아 보인다고 하더라도 일하면서 알게 모르게 주어 듣는 것들이 있거든. 그러다 보면 매니저 급 이상의 큰 일을 할 수 있는 법이야"


갈팡지팡 하는 사회초년생에게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값진 조언들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미 언니는 싱가포르에서의 생활이 행복하지 않은 듯 했다. 하루의 2/3 정도의 시간을 보내는 회사에서의 생활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은 평소에 나누는 대화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집으로 바로 귀가하는 일이 적어지고 밤 늦게야 귀가하곤 했다. 언니가 원래 혼자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인 것은 알았지만 밤에 어디를 다니는 것인지 궁금했다. 한번은 내 생일 축하를 해주고 싶다고 해서 래플즈 플레이스에서 만났다. 안드리도 초대했지만 회사 일이 바쁘다면서 오지 않았다. 

 


언니는 어차피 깊은 대화도 안 통하는 사이인데 차라리 안 오는게 잘 됐다고 말했다. 언니는 회사생활 하면서 자주 가는 곳이라며 스테이크 집에 데려가서 소고기를 먹이게 하고는, 식후 소화를 겸해서 집으로 돌아가기 전 산책을 했다. 클락키(Clarke Quay)까지 이어지는 강변을 정처없이 걸었는데 유흥지로 유명한 곳인 만큼 네온사인이 강변에 반사되어서 번쩍이고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함께 강변을 걷는 언니의 마음은 고독했다. 누구나 한 번쯤은 느껴봤을 감정이라고 생각하는데, 주변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들로 둘러싸여서 저렇게 행복한 듯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 세상에는 나 혼자인 것만 같은 고독이 전해진다고 할까. 

 


자주 가는 길이라며 안내하는 길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도시의 뒷골목 같은 곳이었다. 언니를 보면서 회사 다닐 때 동료 차장님을 통해서 목격하곤 했던 '40대의 사춘기'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머리 속에 떠올랐다. 더이상 회사에 돌아가고 싶지 않고 기술을 배우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며 몇 날 며칠을 방에서 조용히 리서치를 하던 언니는, 드디어 마음을 정한 듯 했다. 미국에 있는 친구의 영향을 받은 듯 했는데 미국으로 공부하러 가겠다고 말했다. 며칠 전에는 일본에서 낙농업 기술을 배우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도 했던 터라 갑자기 미국으로 떠난다는 이야기에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미국에서 배우고 싶다는 기술은 평소에 사람들 개개인에 관심이 많은 언니에게 꼭 알맞는 전공이라고 생각했다. 


 

20대 시절에는 영화를 좋아해서 연극배우가 되고 싶어하던 언니는, 싱가포르 생활을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홍콩 여행을 떠났다. 왕 가위 감독이 만들고 장국영 출연한 영화를 좋아하던 언니 다운 결정이었는데 홍콩에 가서는 장국영의 묘비에 찾아가 꽃다발을 헌화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새로운 큰 결단을 내리기 이전에 자신의 마음을 다잡기 위한 하나의 의식처럼 여겨졌다. 

 


곧잘 어디로 나아갈지 몰라서 방황을 하는 나는 지금도 곧잘 삶이 답답하게 느껴질 때면 언니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미국에서의 학업이 벅찬 모양으로 아주 길게 이야기를 이어 나가지는 못하지만 짧은 대화 속에서도 핵심을 찌르는 조언을 해준다. 이것을 하면 어떨까 저것을 하면 어떨까 하고 나는 매번 다른 계획을 펼치는데, 언니는 왜 매번 계획이 바뀌냐며 비난하는 기색 없이 뭐든 마음 가는 곳에서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라는 말로 격려해 준다. 아마도 회사만이 정답이 아닌 것을 알고 자신 역시 40대에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기 때문에 타인에게도 언제든 늦었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도전해 보라는 대답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단지 어서 정착할 곳을 찾으라는 말을 덧붙였지만 말이다. 





 

<현대판 유목민들의 성지>


싱가포르에 살기 전 스페인 출신의 마누엘이 충고했던 것처럼 싱가포르에서 친구를 사귀는 것은 쉽지 않았다. 택시를 탈 때면 의례 한 달에 얼마 정도의 집세를 지불하고 있는지 물어오는 택시기사들. 모두가 영어를 쓰고 서구적인 마인드를 탑재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엄연한 중화권 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게도 돈에 대한 이야기를 스스럼 없이 해오는 사람들에게 질리고 말았다



물론 나도 싱가포르에서의 생활이 길어질수록 돈에 대해서 물어오는 질문이 아무렇지 않아져 가고 가끔은 내 쪽에서 먼저 집세나 급여에 대한 부분을 물어보기도 했지만. 여전히 한국에서 받아 온 영향 탓으로 돈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실례라고 생각하는 탓이다. 


 

좁은 땅에 인구밀집도가 높다 보니 살면서 가장 부자들을 많이 본 시기이기도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그들과 나의 삶을 비교하며 불행하다고 느끼는 일도 없을 테지만, 당장 길거리만 나가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람보르기니 자동차, 화려한 콘도미니엄 시설 등이 가지지 못한 자들을 '불행하다'고 느끼게끔 했다. 집주인 안드리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부모님 집이라고는 말을 하긴 해도 장차 자신의 집이 될 7억짜리 싱가포르의 집, 어렸을 때는 자카르타의 영국 국제학교를 나오고, 다른 동남아시아 주변국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싱가포르 영주권을 가지고 있음에도 자신을 잘 산다고 생각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인도네시아 일반인이 다닐 수 없는 국제학교를 다니면서 고급 인맥들을 쌓다 보니 또다른 비교를 하게 되는 모양이었다. 자신의 인도네시아 친구는 본인 소유의 섬이 있다고 한다던가, 일을 하지 않고 놀면서 지낸다는 이야기를 부러운 듯이 이야기해줬다. 올라가면 또 위의 계층 사람들이 지내는 모습이 보인다며 무한 경쟁구조라고 했던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다. 


 

싱가포리언 친구를 사귀는 것에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현대판 유목민들의 성지' 라고 명명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전세계 사람들이 일하러 와있는 싱가포르에는 흥미로운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이었다. 인도네시아의 발리, 태국의 치앙마이도 마찬가지로 현대판 유목민들의 성지라도 이름 붙여도 좋을 테지만 그곳들에는 디지털 노마드 라고 해서 풀타임 유목민들이 몰려든다. 반면 싱가포르는 화이트칼라 유목민들이 많다고 해야할까. 그들에게 싱가포르는 해외에서 처음 살아보는 국가가 아니었고 여행 경험과 더불어 다채로운 국제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어느 고용주에 속해 있는 그들은 또다른 부류의 유목민들이었다. 



여기서 '화이트칼라'의 유목민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할 때 싱가포르 정부가 학벌과 월 급여로 철저하게 비자 종류를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가정부나 건설직 노동자를 고용하기 위한 최하위 비자도 존재 하지만, 그 외로는 월200만원 혹은 월300만원 이상의 월급을 받을 것 그리고 대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한다는 조항을 명시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월 2,3백만원을 버는 게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닐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동남아 국가들에게 있어서는 흔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아시아 판 캘리포니아 드림을 꿈꾸는 동남아시아 인재들 그리고 전세계의 인재가 몰리는 탓에, 화이트칼라 유목민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그래서 싱가포르에서 지내던 기간 동안 그들과의 교류가 진심으로 즐거웠다. 한 번은 일본인들이 주최하는 요트 파티에 참석했다가 미국에서 학교를 졸업했다는 이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눴다. 왜 싱가포르에 왔냐는 질문에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라는 대답을 했다. 국내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모두 획일적이라 재미없었다는 이야기를 덧붙이면서. 그렇다고 해서 싱가포르가 현대판 유목민들의 정착지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정착지가 되기에는 싱가포르 정부의 임의로 비자가 연장되지 않을 가능성, 높은 물가, 해가 갈수록 받을 확률이 희박해지는 영주권 제도로 인해서 오래 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런데도 싱가포르를 떠나 온지 어느덧 두 해가 되었음에도 싱가포르에서의 생활이 그리워지는 건 주말이면 떠나곤 했던 동남아 주변국으로의 여행, 그리고 지금보다 더 행복할 수 있는 곳을 찾아 헤매는 비슷한 유목민들과의 진한 대화들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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