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는 보일러실에서 했지만

작고도 구슬픈 행복 1

by 지혜인

2016년 제주도로 이사를 왔을 때 나는 난생처음 '년세'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다.

제주도는 집을 구할 때 월세가 아니라 '1년에 얼마'라고 하는 '년세'라고.

그리고 중요한 것은 선입금.


호주에서 인터넷을 통해 연락해 놓은 제주도 성산읍의 시골 주택은 년세가 500만 원이 넘었다. 하지만 호주의 집세에 비하면 1년에 이 정도는 정말 땡큐-베리-감사 라고 생각했으므로 크게 비싸다는 생각 없이 들어가 살 게 되었다.


집 건물은 컨테이너 하우스였는데 방 2개에, 무엇보다도 넓게 울타리가 쳐진 잔디마당이 마음에 들었다. 막 추석연휴가 지난 10월이라 잔디는 푸르르고 하늘은 하얀 뭉게구름이 피어나 더없이 몽글몽글한 날들이었다.


매일같이 여보씨와 잔디마당에 누워 뭉게구름이 무슨 모양인지 시시껄렁한 대화를 하며 제주도로 이사 온 첫 달을 보냈을 것이다.




우리는 곧 서귀포시에서 차로 20분이 걸리는 시골 마을의 영어공부방을 인수하게 되었다.

근처에서 전과목 공부방을 몇 년째 해오신 제주 토박이 선생님께서 우리 년세 가격을 듣고는 기겁을 하시는 거라. 거리도 버스를 갈아타고 1시간이나 넘게 왔다갔다 하면서 무슨 궁궐이길래 그리 비싸냐고.


아... 이게 비싼 축에 드는 건가요?

저희는 마당이 넓고 푸르러서 그냥 괜찮던데요^^;;


전과목 선생님은 공부방 인수비용을 다 치르지 못한 우리 사정을 알고 계셨기에 도보 가능한 거리에 있는 싼 시골집에 들어가 지금은 돈을 모으는 게 좋겠다고 친정엄마와 같은 눈빛으로 애정 어린 잔소리를 해주셨다. 그리곤 제주의 찐 토박이 노하우가 있으신지 며칠 만에 120만 원짜리 년세집을 구해주셨다.


그 집은 시멘트 마당을 공유하는, 안집엔 주인부부가 사시고 우리는 마당 안쪽 감귤창고를 개조해 놓은 살림집 세살이.


이곳으로 이사를 오면 적어도 공부방 인수비용은 바로 치를 수 있었다. 영어공부방을 이미 인수받은 터라 잔금을 되도록 빨리 해결하는 게 예의이기에, 그 살림집은 보일러실 구석에 있는 샤워기로 샤워를 해야 하고 마당을 가로질러 화장실에 가야 하지만 크게 고민하지 않고 이사를 했다.


나는 서울로 대학을 와 자취를 하기 전까지 뒷문 밖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과 시멘트 앞마당 샘에서 목욕을 하는 시골집에서 자라 생소할 게 없었지만, 태어나서 한 번도 욕조가 없는 집에 살아 본 적이 없고 화장실에 가려면 신발을 신고 마당 끝까지 가야 하는 집의 구조는 본 적도 없는 호주인 여보씨는 아마 매우 낯설고 불편했으리라.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때를 회상하면 우린, '그렇게 애달펐지'가 아니라 '맞아 그때 참 재밌었지'라는 사실을 아실련지 으힛^^




세 들어 사는 살림집은 안집과 마당만 공유할 뿐 별채처럼 따로 떨어진 공간이라 심적인 불편함은 없었다.


다만 샤워를 하려면 신발을 신고나와 보일러실로 가야 한다. 보일러실 한쪽 구석에 샤워기만 달랑 설치되어 있는 그 공간, '아 여기서 샤워를 해야 하는구나' 하고 여보씨와 웃음을 터트렸던 그곳엔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작고도 구질구질한 행복이 하나 숨어있었다.




마저 다 쓰려했는데 눈이 감겨서 다음에 계속... 하하하^^


오늘 하루 종일 밭에 풀을 뽑고 옥수수 심을 땅을 고르다 보니 노곤합니다.

모두 안녕히 주무세요, 굿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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