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세 살이 그 제줏집을 사랑했다.

작고도 구슬픈 행복 1

by 지혜인

제주에서 세 살이를 했던 그 동네는 한라산을 바로 등지고 있어서 골목 어디를 걸어도 한라산이 눈에 잘 들어왔다. 둘리치킨집을 지나 초등학교 모퉁이를 돌아서 동네 한 바퀴를 산책하는 날이면 한라산이 어쩜 이토록 청명하냐며 여보씨는 연신 어메이징 -이라고 말했다. 어메이징!


그때는 미세먼지도 없었기 때문에 날씨가 맑은 날에는 백록담과 하늘의 경계가 선명히 보여 정말 몇 발작만 가면 한라산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키가 작은 나는 시야가 담장 끝에 가 닿아 까치발을 들어야 그나마 한라산이고 백록담이고 볼 수 있는 그런 골목이 많아서 아쉬웠다.



샤워는 보일러실에서 했지만


구석에 샤워수전만 달랑 설치되 있는 보일러실 귀퉁이 = 우리의 샤워실은 거울도 달고 선반도 놓으니 꽤 그럴듯해 보였다. 하지만 다른 쪽 구석에는 기름통이 쌓여있고 거미줄이 늘어져 여전히 시멘트 창고 같은 느낌이 들었다.


거미에게 인사를 하며 옷을 주섬주섬 벗는다.

어제는 둘이었는데 오늘은 셋이네

다 벗고 샤워를 하는 곳에 거미 녀석이 허락도 없이 친구를 초대했다고 여보씨와 깔깔깔


11월에 세 살이를 시작했으니 겨울이 깊어질수록 샤워는 짧고 간단히, 이가 맞지 않는 창문은 항상 엄지손가락 한마디만큼을 겨우 열어놓고 샤워를 마쳤다.



화장실 가는 길


감귤창고를 개조해 방 2개, 주방으로 개조한 살림집은 문을 열면 바로 귤이 주렁주렁 달린 귤밭이 한없이 보였다. 그 사이를 지나 마당을 통과해 화장실을 가는 길, 조금 번거롭긴 해도 나쁘지 않았다.


이때 아니면 이 많은 귤나무를, 그것도 앞마당에서 매일 보는 날이 또 언제올까.

심지어 귤나무가 우거진 이 풍경의 끄트머리는 한라산으로 이어지는 백록담인 것을.

이걸 한눈에 볼 수 있는 주방문에 걸터앉아 우리는 아침 기지개도 켜고 차를 우려 마시며 각자 가장 좋아하는 책을 들고 와 의도 좋게 또 주방문에 걸터앉았지만 이야기만 가득 늘어놓는 그런 날들이 많았다.


샤워실과 화장실만 괜찮았다면 도시사람들도 분명 그 공간을 좋아했으리라.



"여보씨 화장실"

나는 그의 달콤한 꿀잠을 깨우는 새벽 군손님.

가로등도 없는 깜깜한 어둠을 헤치고 혼자 화장실에 다녀올 담력이 없다 나에겐.


여보씨의 손을 잡고 화장실에 가던 그 수많은 밤, 우리는 마당에 서서 쏟아질 듯 반짝이는 제주 밤하늘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우아


별자리는 잘 모르지만 이런저런 모양을 맞춰가며 그 길로 새벽 산책을 나서는 날도 가끔씩 생겨났다. 겨울이라는데 제주도라 그런가 두꺼운 후드티만 입어도 그 해 겨울은 매우 따뜻했다.



보일러실에서 발견한 작고도 구질구질한 행복


"여 보 씨!"

샤워를 마친 그가 허리춤에 비치타월만 걸친 채 뛰어와 살림채 창문으로 얼굴을 빼꼼히 내민다.

주로 내가 여보씨라 부르지만 그도 나를 가끔은 여보씨라 부르는데, 특히 무언가 꼭 알려주고 싶을 때 나를 부르는 그의 '여보씨'는 잔뜩 신이 나 있다.


여보씨 손에 이끌려 보일러실 문을 열어재낀 순간 활짝 열린 창문으로 그림 같은 한라산이 쏟아진다.

하늘과 경계를 짓는 백록담 바위까지 이리 잘 보일 일인가


작은 창문이 딱 하나 있는 보일러실은 낮에도 불을 켜야 할 만큼 어두웠는데 그런 어둠을 뚫고 액자 같은 창문이 한라산을 쏟아내고 있었다.


내가 특별히 까치발을 들지 않아도

샤워를 하며 바라보면 딱 좋을 높이에

오렌지빛 귤들이 반짝이는 귤밭을 배경으로

보일러실 창문은 말 그대로 그림 같은 액자였다.


우리가 사는 모습이 궁금해 육지에서 된장이며 고추장, 직접 수확하신 깨와 검은콩, 얼려둔 나물까지 짐을 한 보따리는 들고 비행기를 타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던 친정엄마도 샤워하면서 바라보는 백록담의 모습을 참 좋아하셨다. 그리곤 화장실과 샤워시설을 보며 참 애잔해하셨지만.


하지만 그러게 왜 호주에서 잘 살다 한국에 왔냐며 딸래미를 걱정할 틈은 별로 없으셨을 것이다. 아빠의 암이 재발하지 않도록 암에 좋다는 식단을 신경 쓰며 농사일을 하기에도 엄마는 하루가 바쁘셨을 테니.




이듬해 봄, 날씨가 따뜻해 제주도에 제일 많은 관광객이 찾아드는 4월

우리는 6개월도 마저 채우지 못하고 그 세 살이 제줏집과 이별했다.


아빠의 암이 재발했고 항암치료를 받는 아빠를 더 자주 보기 위해 친정 근처 육지로 이사를 했기때문이다. 한 달에 300만 원이 넘는 수입을 벌어다주던 공부방도 아쉬웠지만 다른 분께 넘겨주었다.


안채에 사시는 주인아주머니, 아저씨께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전골을 사주시며 어디 가든 잘 살라고 이런저런 인생얘기를 해주셨는데, 우리 이삿짐을 택배로 보내는 날 아저씨는 트럭을 몰고 택배장까지 오가며 이삿짐 박스를 같이 날라주셨다.


반찬은 뭐 먹고 사냐며 이것저것 싸주시던 전과목 선생님, 빈 반찬통을 드리기 뭣해서 친정엄마가 갔다주신 검은콩을 담아 드렸는데 그걸 보고 웃으시던.

딸기 품앗이를 다녀왔다며 조금 무르지만 참 달던 딸기를 한 바가지 주시던 주인아주머니,


우린 그렇게 제주도에서 감사한 분들을 참 많이 만났다.

춥지 않은 겨울이었다.




지금 아니면 언제 또 이런 집에 살아보겠냐며 그때 그런 얘기를 많이 했었어요. 그런데 또 살라면 살 수 도 있을 것 같아요. 지금은 샤워도 화장실도 없는 캠핑카에서 먹고산 지 2년이 넘었는걸요 뭘.


혹시 이 노래를 아실까요?

'Counting Stars' by OneRepublic


노랫말을 좀 들어보세요-


Lately I been I been losing sleep
Dreaming about the things that we could be
요즘 들어 난 밤 잠을 설치고 있어.
우리가 이룰뻔한 것들을 꿈꾸며 말이야.

But baby I been I been prayin' hard
Said no more counting dollars
We'll be counting stars
Yeah we'll be counting stars
하지만 요즘 또 열심히 기도를 해
더 이상 돈을 세지 말자고
밤하늘에 별을 세자고
그래 이제부터 우린 밤하늘에 별을 셀 거야


저는 이 노래를 들을 때면 제줏집에서 보던 까만 밤하늘이 떠올라요, 화장실 가는 길에 마주하던 그 밤하늘이요.


우리도 우리가 호주에 계속 살았다면 이룰뻔한 것들을 이야기하며 밤 잠을 설치던 날이 무척 많았거든요. 그러다 밖에 나와 무수한 별을 세던 그런 밤들이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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