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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HYE Jan 21. 2020

물들어 있는 마음

1.


낙서들이 수북이 쌓여있었던 대학교 앞 막걸리집을 기억해본다.


요새는 찾기 힘든 좌식형 막걸리집에는 무리의 젊은 대학생들, 등산을 마친 지 꽤 오래되어 보이는 거나하게 취한 아저씨들이 삼삼오오 모여 뜨뜨무리한 소음을 만들고 있다. 반주 삼아 시작했을 법해 보이는 사람들의 테이블 위에는 찢어놓은 파전 조각들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아무래도 이 막걸리집에서는 짜게 식은 파전만이 외로운 듯하다. 몇 겹의 무리들을 헤치고 자리한 막걸리집 탁자와 한지 스타일의 벽지가 위태하게 붙은 벽을 두리번두리번 살펴본다.


‘김보연 펑펑 운 날 – 12월 24일’

‘오늘 여기 와서 세상을 다 얻은 것 같다!’

‘우리 똘마니들과 함께. 행복하자!’


기록한다. 주황색 불빛이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드는 이 막걸리집에서 술이 도에서 시까지 취한 어느 날, 그 누군가들은 마음을 아작 낸 놈팽이를 저주하며 펑펑 울며 기록하고 그 어떤 누군가들은 함께 한 사람들과의 순간을 그저 스치기엔 아쉬워 벅찬 마음을 흘려볼까 기록한다. 누런 한지에 까맣게 물든 글씨처럼 그네들의 마음에 자근히 물들어 있는 그 사람, 그 순간을 낙서로 눈 앞에 꺼내어보는 것. 그렇게 한 자씩 쓰다 보면 엉켜있던 수많은 감정들이 명확해지기도 할 테니까.


낙서들을 한차례 둘러보니 나도 모를 미소가 번진다. 벌건 얼굴로 네임펜이 부러져라 꾹꾹 눌러썼을 그 사람들을 상상해보니 왠지 귀여운 마음에 웃음이 나버린다.





2.


편지를 써보려 펜꽂이에 꽂혀있는 펜을 잡히는 대로 한 자루 들고 온다. 너에게 쓰려하는 편지에는 깜장 펜으로 쓸 예정이니 한번 적으면 마음을 돌이킬 수 없기에 빈 종이에 끄적끄적 낙서 겸 초안으로 휘갈겨본다. 이내 관둔다.


보편 하고 진부한 단어들만 머리에 맴도는 것 보니 좀처럼 편지를 시작하기 어렵다. 조금은 특별한 단어들을 입은 마음들을 적어두고 싶은데 말이지. 그리고 결국 적은 편지에는 진부한 단어들을 기어코 쓰고 말았다. 골똘히 생각하며 적었지만 결국 보여주고 싶은 단어들은 이 단어뿐인걸. 그렇다고 신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신중했기에 그 단어였던 것. 어쩔 수 없이 적어둔 그 진부한 표현들은 사실, 그 어떤 끄적임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너에게 쓰는 편지에 굳이 특별할 단어를 끄적일 이유는 없다 생각했다. 그 단어라는 오브제를 택한 나의 생각을 당신의 마음이 알아줄 테니까.


마음이 물들어버린 편지를 읽는 당신의 흐뭇한 미소를 이미 봐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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