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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HYE Feb 16. 2020

스트랩이 끊어져 버린 가방은

취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티가 팍팍 나는 스물다섯 살의 겨울에 남동생과 함께 광장시장엘 갔다. 한창 광장시장에 자주 방문했던, 빈티지 느낌 가득한 동생과 함께 가게 되니 그 길이 매우 든든했다. 적어도 핫바지로 보이진 않을테니까. 


작은 박스 모양의 검은색 숄더백. 어깨에 맬 작은 가방을 득템하는 것으로 정했다. 사고싶은 아이템을 정확히 정해야 안 헤맨다나 뭐라나. 동생을 따라 쫄래쫄래 따라다니다 만나게 된 매장에는 온갖 모양의 숄더백이 천장에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손이 닿을랑 말랑한 높이에 달려있는 가방들을 하나씩 살펴보니 낡디 낡은 버버리 브랜드 가방도 있었고 휘향 찬란한, 어디에 써야 할지 모르겠는 가방들도 있었다. 그렇게 목이 부러져라 한참을 보던 차, 머리에 그렸던 검은색 숄더백이 보였다. 가방 여닫이 단추는 때가 탄 금색 장식이었고 숄더 스트랩은 조금씩 헤져있었지만 빈티지스럽게 멋있게 마모되어 있었다. 열어 본 가방 안에는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브랜드명과 그 아래 나지막이 작은 글씨로 ‘made in paris’라고 적혀 있었다. 이거다, 싶었다. 그리고 이 가방의 주인을 잠시나마 상상했다. 


가방의 주인이었던 여자의 이름은 Ines, 박시한 점퍼와 짧은 스커트를 입고 워커를 자주 신는 코 피어싱을 한 여자. 점퍼 위에 이 클래식한 검은 숄더백을 크로스로 메서 믹스 앤 매치를 트렌디하게 할 줄 아는. 그런 여자. 가방은 말이 없고 나의 상상은 자유이니까. 상상을 마치고 나니 이 가방의 진짜 사연이 무엇이든 상관없어졌다. 쏙, 맘에 들었다. 3만 원의 나이스 딜-을 하고 마치 Ines가 된 것 같은, 왠지 모를 당당함이 생긴 애티튜드로 광장시장을 나섰다.



그 가방은 나와 꽤 오랜 시간을 같이 했다. 회사에 갈 때도 메고 친구들을 만날 때도 메고. 외출 전 많은 가방 옵션 중에서도 꼭 그 가방을 선택하게 되더라. 그리고 그 가방은 참 신기하게도 유럽 출장 두 번째 날에 명을 다 했다. 너의 동네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었던 거니. 출장 중에 커피를 사 마시려 잔돈 뭉탱이를 꺼내는데 스트랩이 똑 하고 끊어져 버리더라. 난 이제 내 할 일을 다 한 것 같아- 즐거웠어- 라는 말을 들은 것만 같은 깔끔한 생의 마무리. 가져왔던 가방은 그 하나였기 때문에 남은 날들은 대에충 묶어서 똥강해진 가방을 어렵사리 들고 다녔지만, 그렇게 예고 없이 떠나버리려는 가방이 꽤나 얄궂게 느껴졌다. 얼마나 아꼈는데.


그 가방은 오래도록 고장 난 채로 나의 이삿짐에 항상 함께 했다. 몇 번의 이사 중에도 다시 쓸 수 없는 그 가방은 버릴 수가 없었다. 그 가방을 버리면 가끔은 그리워질 나의 과거를 어디에서 그리워할까. 하는 울적함 때문이었다. 설렘 가득한 상상들과 20대의 ‘지혜’가 고스란히 묻어있는 피사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따금 옷장을 열어볼 때 더 다양했던 나의 감정들과 사건들을 눈 앞에 그려놓았다. 그 과거들은 쉬이 잊혀지기엔 다양한 관계 속 때론 고통스러운 찰나의 연속이기도 했었고 때론 아름다웠다. 그리고 잊혀지지 않기에 지금 30대의 나는 또 맞이하는 새로운 아픔과 고통 앞에서 생채기가 빠르게 아물 수 있도록 나를 보듬어줄 수 있게 되기도 했으며 아름다운 순간 앞에 고스란히 존재할 수도 있게 되었다고.



그리고 올해 옷장 속 케케묵은 옷들을 정리하면서 그 가방도 함께 버리게 되었다. 가방 안에는 유럽에서 나를 괴롭혔던 다양한 종류의 코인들이 작은 주머니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알 수 없는 알파벳이 늘어놓아져 있는 영수증 몇 개가 발견되었다. 나의 찬란했던 20대는 한 켠에 잘 남겨두었으니 애써주었던 가방은 놓아주어도 되겠다고. 애틋한 마음이 섞인 얇은 미소가 지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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