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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HYE Apr 20. 2020

멀어짐을 대하는 마음이 익숙해지는 것은

초등학생 때 공부를 곧잘 했다. 과외선생님인 엄마 덕에 굳이 학원을 다니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한 것이 있다면 나의 초등학교 시절에 한창 유행했었던 학습지다. 반 친구들은 구몬파, 눈높이파, 빨간펜파, 씽크빅파 등등으로 나뉘었고(나는 구몬파였다.) 꼬깃꼬깃한 종이 학습지를 든 손을 설레설레 흔들며 놀이터 뱅뱅이에 모여 함께 왁자지껄 학습지를 풀곤 했다. 그런 탓에 학습지에는 이따금 서걱서걱 모래가 느껴졌다.


매주 학습지 선생님은 지난 한주 공부한 학습지를 함께 체크해주고 다가올 한주의 새로운 학습지를 전하려 우리 집에 찾아왔는데, 그 시간은 나에게 매번 설레는 시간이었다. 거실에 작은 밥상을 펴고 평소에는 잘 마시지도 않는 델몬트 무가당 오렌지주스를 두 잔 따라놓고 흘끔흘끔 시계를 쳐다보며 안 기다리는 척 선생님이 오길 기다렸다.


단발머리의 구몬 선생님은 밝은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환한 웃음을 지으면 나도 함께 환해졌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수학을 알려줄 때면 마냥 어려웠던 수학이 그 순간만큼은 세상 쉽게만 느껴졌다. 엄마는 이따금 선생님에게 나의 공부 진도 상태를 체크하느라 상담을 하기도 했고 잘 부탁한다며 엄마다운 말들을 선생님에게 건네기도 했다. 그때마다 선생님은 엄마에게도 여전히, 환한 미소로 답했다. 그리고 그 설렘 가득한 공부시간은 아쉽게도 오래가지 못했다.


“지혜야~ 선생님 이제 가신대. 진짜 안 나올 거야?”


구몬 선생님이 한 번씩 로테이션되는 시스템 때문에 첫 번째 선생님이 곧 떠나야 하는지도 모르고 아뿔싸, 정이 쉽게 들어버렸던 것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수업을 신나게 마치고 난 후 오늘이 선생님의 마지막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어버렸다. 내 방에 뛰쳐 들어가 엉엉 울다 겨우 현관문 앞에서 선생님에게 마지못해 마지막 인사를 어렵사리 건넸다. 다시는 못 볼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는 그 손이 그렇게나 파르르 떨릴 수 있는지 그때 처음 알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많은 구몬 선생님들을 만나고 이내 헤어지는 때에는 꾸준히 울어재꼈다. 참, 일관성 있기 어려운 것에 일관했다.



어렸을 때부터 인연이 닿아버린 사람과의 멀어져야 하는 타이밍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마음의 문이 사람마다 각기 다른 재질과 모양을 갖고 있다면 나의 문은 한지를 덧대어 나무로 만든, 바람으로도 쉽게 열릴 수 있는 창호문이었지 않았을까.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 자주 상상하는 그림이 있다. 사람과 사람은 각자의 손에 커다란 비눗방울을 들고 있다. 그 비눗방울은 ‘각자의 인생을 구조하고 있는 시간’을 뜻한다. 그 둘이 스칠 때 비눗방울은 두리둥실 떠올라 하나의 비눗방울처럼 조화를 이룬다. 그 조화는 실로 아름답지만 여전히 ‘두 방울’로써 존재한다. 그 시간이 맞닿아 존재하는 나와 네가 만나 지금을 만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마음 다해 행복해했을지도 모르겠다. 


익숙해진다는 말을 좋아했던 날들이 많았다. 나를 익숙하게 하는 것들이라면 그 어떤 것이든 의미 있고 가치 있을 수 있다 생각했다. 어쩌면, 해가 더해갈수록 ‘익숙해지다’는 말이 씁쓸해지는 순간이 많아지는 건 나의 감정을 동하는 것들을 쉽게 감내할 수 있게 됨을 뜻하는지 아님 무뎌져 버린 것인지에 대한 고민들 때문일지도. 그리고 멀어짐을 대하는 나의 마음이 예전만치 동하지 않아 버린 것이 익숙해지는 지금의 나이가 조금은 씁쓸하다는 것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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