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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HYE Apr 13. 2020

할머니를 기억하기 위한 글

4월 중순을 달려가고 있는 날씨는 봄을 성큼 가져다주었다. 전라북도 익산으로 향하는 그 길은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벚꽃이 흐드러져 있었고 침묵 속 달리는 차 안은 점점 후덥지근해졌다.


“할머니가 이제 얼마 안 남은 것 같아. 지혜야, 하던 일 마무리하고 익산으로 아빠랑 같이 내려와라.”


울먹이는 엄마의 목소리가 귀에 계속 맴돌았다. 어쩌면 예상했던 일이었다. 3년이 넘도록 병상에 누워있던 할머니는 시간이 지날수록 공허한 눈으로 우리를 맞이하는 일이 많아졌고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갔다. 나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 가족을 위로해야 하는 걸까 머릿속으로 그려보면서 준비했었음에도, 그 준비보다 앞서 찾아와 버린 슬픔과 좌절은 생각보다 빨리, 그리고 연습했던 것보다 크게 찾아왔다. 


가는 길 내내 아빠는 차 안 무거운 침묵을 애써 깨보려 시답잖은 농담을 던지기도 하고 최근 회사일은 어떤지 물어보기도 했다. 대답을 했는지 안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 침묵 속 던져진 무의미한 대화는 여전히 가야 할 길이 먼 우리의 초조한 마음을 돌처럼 짓눌러갔다. 그리고 할머니는 오후 1시 26분, 봄을 한껏 머금은 시각에 할머니의 시계를 멈추었다. 고속도로 옆 벚꽃은 아름다웠으나 너무 아름다워서 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재작년 할머니의 생일날,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를 병원에서 모셔와 온 가족이 모여 거한 아침밥을 먹었다. 그때도 할머니의 시계는 곧잘 거꾸로 가는 탓에 대화가 산으로 가긴 했지만 가족들은 그저 모두가 한 데 모여 밥 한 끼 함께 하고 도란도란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식사가 끝나고 상을 치우는 동안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할머니 옆에 앉아 시집 못 간 손녀의 근황을 전했다. 주변 사람들이 외가나 친가에 가면 듣는다던 잔소리를 할머니에게서 듣고 싶었다. 


“할머니, 할머니 손녀가 벌써 서른이 넘었어요- 근데 나 아직 시집 못 갔다?”


“시집 늦-게 가. 누가 빨리 가라혔어?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보면서 찬찬히 따져봐야 되는거여. 찬찬히 따져보고 가도 안 늦어. 좋은 사람 만나서 가야 결혼이 행복한거여. 당차게 살어. 알겄어?”


허공을 휘젓는 듯했던 할머니의 눈동자가 동그레 지며 나에게 반듯하게 향했고 그 순간 할머니에게 이따금 찾아오는 할머니의 현재를 만났다. 거꾸로 돌아가는 할머니의 시계를 거슬러 우리에게 힘겹게 찾아온 할머니를 마주한 그 순간, 여전히 멋진 잔소리로 내 염려를 다그쳐주셨다.




장례를 마치고 가족 모두가 한데 모여 할머니의 유골함 앞에 둘 사진을 하나씩 들쳐보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결혼을 앞두고 함께 찍은 오래된 흑백사진을 발견했다. 사진 속 새초롬한 표정의 단발머리 처녀는 머리를 멀끔히 올린 번듯하게 생긴 청년 앞에 수줍게 앉아 있었다. 사진첩을 한 장씩 넘기니 어느새 그 어여쁜 처녀는 5남매의 결혼식 사진에 혼주로 등장했고 어린아이들의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사진 속 할머니를 보며 그녀를 오래도록 추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시간이 갈수록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져도 추억하고자 했던 할머니를 향한 나의 수많은 감정들은 오래도록 남을 수 있을 것 같으니. 할머니와 닮은 햇살 가득한 4월의 봄이 오면 사진 속 봄처럼 웃고 있던 그녀를 자주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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