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 개의 양말

날아라 양말,

by 다정한 지혜씨

양말에 날개가 달려 날아가는 상상을 하곤 한다. 날개 달린 양말은 산으로 들로 바다로 정처 없이 떠다닌다. 자의로 타의로 날아가던 양말은 어느새 어릴 적 내가 살던 지금은 없는 집으로 모여든다. 그 모습은 마치 철새들이 보금자리를 찾아 떠나갔다 되돌아오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다들 양말을 생애 한 번쯤은 사 봤을 것이다. 양말의 생김새는 사람의 얼굴처럼 제각각 다르다. 종류와 색깔, 크기와 두께마저 다른 양말은 사람과 많이 닮아있다. 신발을 신기 위해선 무조건 양말을 신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경험하지 못한 악취와 잊지 못할 고통을 함께 겪는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부천으로 내려오자마자 일을 구하러 다녔다. 갑자기 없어진 큰 아들의 부재를 하루빨리 채워야만 했다. 그러나 육십을 갓 넘긴 두 분에게 일자리를 덜컥 맡길 사람은 거의 없었고 시간은 기어이 흘러갔다. 그렇게 서울에서 가지고 내려온 돈이 거의 다 떨어질 무렵 동네에 안타까운 우리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사람을 다룰 줄 아는 분이다.) 며칠 후 근처 부업집 사장님께 전화가 왔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양말 뒤집는 부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고우신 두 분은 나와 언니를 키워내기 위해 오랫동안 부업 일을 하셨다. 그들은 어린 손녀들을 학원과 학교에 보내야 했고 교복을 사주어야 했기에 늘 마음이 바빴다.


매일 아침 우리 집엔 내 키보다 더 큰 검정포대가 두 개씩 배달됐다. (어느 날은 세포대도 왔던 것 같다.) 포대 안에는 마구잡이로 쑤셔 박힌 양말들이 들어있었고 두 분은 그 양말들을 뒤집어서 차곡차곡 색색깔의 노끈으로 묶었다. 열두 켤레, 즉 스물네 개로 짝지어진 양말들은 자로 잰 듯 사이즈와 두께에 맞게 변별해 묶였고 두 분의 실력은 나날이 손이 빨라져 생활의 달인에 나올 정도였다. 아마도 어린 손녀들을 키워내기 위해 바쁜 마음이 손으로 옮겨간 듯했다. 부드러운 양말에 손이 계속 스치면서 그 자리에 자국이 남는다. 손등이 갈라지고 피가 터져 대일밴드를 싸매도 아픈 건 똑같다. 할머니의 할아버지의 손에 감겨있던 살색 대일밴드는 훈장이자 내 마음속 가시였다. 언제쯤 두 분이 편안해질 수 있을까 난 매일을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층의 시끄러운 카센터 위에 얹어진 집에 신물이 났다. 부모님이 안 계시는 집도 싫었고 매일 따뜻한 밥상 대신 양말포대에서 나온 먼지모자를 쓴 텔레비전과 구부정한 등을 하고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를 보자 짜증이 났다. 내가 원한 삶은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고 울화가 치밀었다. 남들보다 행복하길 바라지 않았지만 평범하지도 못한 삶에 분통이 터졌다. 모든 것이 갑자기 억울했던 그날 어김없이 양말을 뒤집고 계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향해 라면봉지를 던졌다. 교복을 입고 있던 나는 철이 없었고 눈이 돌아 있었다. 평소에 사춘기도 소리 없이 지나간 착한 손녀딸이 했다고는 믿기 힘든 행동이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두 분은 아무 말 없이 기가 찬 채로 앉아 계셨고 나도 내가 한 행동에 너무 놀라 가만히 서있는 고통스러운 침묵의 시간이 이어졌다. 그렇게 몇 분이나 흘렀을까... 할머니가 수화기를 들었다.


수화기 넘어서는 고모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울먹거리는 할머니의 목소리와 고모가 우리 집으로 뛰어오는 발소리가 동시에 들렸고 그제야 큰일이 난 걸 감지한 나는 갑자기 오금이 저리고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큰일 났다. 지금 나갈까??.. 어떡하지?'

그러나 내 걸음보다 고모의 발이 더 빨랐기에 난 황급히 방으로 숨어들었다.

'방에 있으면 괜찮을 거야, 고모가 들어오진 않을 거야..'

생각이 끝나자마자 고모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 들렸다.

"김지혜, 거실로 나와, 당장."

"........"

벽돌보다 단단한 그 음성에 난 잔뜩 겁을 먹고 거실로 나갔다.


일부러 죄인의 모습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나갔지만 정상참작이란 판결은 내려지지 않았고 정말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이 났다. 고모는 내 부모가 너와 너의 언니 때문에 갖은 고생을 하고 있다고 얘기했다. 너희만 아니었으면 괜찮았을 거라는 말이 가슴에 비수가 되어 내리 꽂혔지만 사실이었다. 난 속으로 역시 내가 이 세상에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을 했다. 잠시 후 고모가 돌아갔고 그날 저녁 나는 굶주린 배를 부여잡고 울면서 잠이 들었다. 물론 배는 고팠지만 죄송한 마음에 방문을 도저히 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고요한 새벽이 지나간 다음날 개미처럼 작은 목소리로 겨우 죄송하다고 말을 하고는 집을 나섰지만 마음이 가벼워지지는 않았다. 말도 행동도 주워 담지 못할 짓은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그때 배웠다.


긴 시간이 흘러 그때 혼나지 않았다면 비뚤어졌을 날 생각하며 몸서리를 친 적이 있다. 잘못을 바로 잡아줄, 혼을 내어 줄 어른이 주변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아이를 낳고 나서 깨달았다. 생각해 보니 아빠, 엄마와 사는 동안에는 단 한 번도 제대로 혼나질 않았다. 워낙 착한 엄마와 착한 아빠는 혼내는 법을 몰랐던 것 같다. (난 지금도 착한 사람이 제일 싫다.) 그 흔한 고함소리를 듣지 않고 산 내게 그날의 고모의 꾸지람은 내가 살면서 배운 어른의 말이었다. 잘잘못을 가르치는 건 어른의 숙명이다. 아이가 올바른 길로 갈 수 있게 모범이 되고 바른말을 해주는 것 역시 잘 자란 어른의 특권이다. 마흔이 다 된 나는 요새 고모와 제일 많은 통화를 한다. 할머니를 요양원에 모신 뒤부터 우린 서로 안쓰러운 존재가 되었다. 나이가 먹어 서로를 이해하게 된 건지 측은지심이 드는 건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여전히 난 고모보다 이모와 더 친하다. 이유는 여전히 모르겠다.)


할머니는 요즘 요양원에서 있지도 않은 넷째 아들을 자꾸만 찾는다.(우리 할머니는 아들 셋, 딸 둘을 낳았다.) 나에게 전화를 걸어 넷째 아들이 군대에서 제대를 했는데도 자기를 보러 오지 않는다며 성을 내시는데 도통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이같이 어려진 할머니를 보면 마음이 아프다가도 웃음이 난다. 반짝거리며 영혼이 눈에 비칠 땐 여전히 내가 아는 우리 할머니 같지만 간혹 흐려진 눈동자에선 다른 이가 보이곤 한다. 매일이 슬프지만 감사하다. 아직은 손을 만질 수 있음에 체온과 숨을 느낄 수 있기에 말이다.



*가을이 한창이다.

파란 하늘과 노란 은행나무를 번갈아 보니 할머니가 생각난다.

그래서 시를 썼다.



그대에게 가는 길


어쩌면 인생이란

색이 변해 떨어지는 낙엽과 지는 노을을

닮은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어 눈보다 귀가 커지고

머리와 땅이 가까워지는 순간이 오면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요?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줄 수는 없지만

지금의 고민이 별것 아니게 될 순간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고개를 들어 파란 하늘을 바라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닮은 하늘입니다.

그대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그대는 평안하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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