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할머니의 삶을 갉아먹으면서 컸구나.

주전자를 찾아서

by 다정한 지혜씨

돌멩이를 보석처럼 키워준 할머니의 고통을 알고 싶어

날 이해하려고 한 민지의 우정을 알고 싶어

네가 램프 바닥에 쓴 글들의 깊이를 알고 싶어.

...

나는 할머니의 사랑 속에 컸구나

나는 그렇게 할머니를 갉아먹으면서 컸구나

나는 할머니의 힘이 아니었구나

그건 할머니의 진실이었구나

나는 할머니의 짐이 맞았구나


- 넷플릭스 <다 이루어질지니> 13화 -



김은숙 작가 드라마는 안 본 것이 없다. 유치하든 슬프든 감동적이든 그녀가 쓴 모든 말이 좋아 보고 또 보고 모든 대사들을 감탄하며 들었다. 귀로도 듣고 눈으로도 봤지만 성에 차지 않아 자막을 틀어놓고서 일부러 몇 번씩 읽기도 하였다. 그녀가 쓴 글이 유쾌해서 좋았고 시대에 맞아서 좋았다. 난 김은숙 작가가 쓴 눈물 없이는 못 보는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을 보고도 오열하지 않았다. 되려 고통스러운 마음과 울분만이 치솟았다. 역사의 어쩌지 못한 부분은 온전한 내 슬픔이 아니었기에 눈물이 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내 눈물샘은 로맨틱 코미디인 드라마에서 터졌는데 그 작품이 바로 '다 이루어질지니'였다.


느끼고는 살았지만 입으로는 내뱉지 못한 말이 텍스트로 자막으로 찍혀 화면에 비치는 순간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나는 할머니를 갉아먹으면서 컸구나"라는 수지의 오열이 영상 밖 내 울음소리에 묻혔다.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화면을 정지시키고 심지어는 껐는데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꺼놨던 퓨즈가 갑자기 켜진 것처럼 한번 터진 수도꼭지는 한동안 잠기지 않았다.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할 시간이 되자 두루마리 휴지 한 개를 거의 다 쓰고 소파에 지쳐 누워있던 나는 그제야 천천히 일어났다.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하자. 맞잖아. 할머니를 갉아먹으면서 큰 건, 이 배추벌레 같은 것아'


속으로 나를 채근하는 순간 할머니는 우주보다 더 큰 배춧잎으로 변했고 나는 작디작은 배추벌레가 되었다. 배추벌레인 내가 할머니를 아무리 갉아먹어도 티가 안 날 정도로 할머니의 배춧잎을 우주 끝까지 확장시키자 눈물이 그치고 실소가 터졌다.

'티도 안 나겠네, 다행이다.'

'내가 아무리 갉아먹어도 할머니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큰 사람이니깐 내가 갉아먹은 삶 따위는 티도 안 날 거야.' 나는 내 마음대로 생각한 해석에 어이가 없어 계속 실실 웃었다.


나는 자주 상상과 공상을 오가며 오늘처럼 미친 듯 웃어젖힐 때가 많다. 마냥 울 수는 없으니 웃기라도 하는 것 같다. 가끔 이런 내 헤픈 웃음이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램프를 찾아서


나는 배추벌레

나는 배춧잎을 갉아먹으면서 자랐다.

작디작은 내 몸은 배춧잎이 사라지는

속도와 비례하여 커졌다.


나는 무럭무럭 자라 오색찬란한 나비가

되어 날아올랐다.

처음 펼쳐 본 날개에는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았다.


긴 비행을 마친 나비는 다시 배춧잎으로

돌아왔다. 지칠 대로 지친 나비의 날개에는

고통과 슬픔, 두려움만이 묻어 있었다.


이파리가 뜯기고 앙상해진 줄기의

배춧잎은 나비를 감싸 안았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비는

배춧잎 안에서 평온하게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나비는 다시 배추벌레가 되었고

배춧잎은 넓은 잎사귀와 굵은 줄기를

가진 모습이었다. 나비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고마워, 지니야. 내 소원을 들어줘서"라고,


- 다정한 지혜 씨 -


위에 글은 시 수업에서' 다 이루어질지니' 드라마를 보고 영감을 받아서 쓴 시이다.


지니에게 소원을 빌 수 있는 수지가 부러웠다. 나한테 그런 기회가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할머니의 집과 건강한 몸을 되돌려 달라고 하겠다. 그리하여 할머니가 나와 다시 손을 잡고 할머니의 작은 동네를 거닐 수 만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


이전 03화처음 졸업사진을 찍던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