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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효 작가 Feb 04. 2022

왕인박사 만나러 영암가오!

4월 첫째 주 남도여행

영암의 봄은 백리나 이어지는 왕벚꽃길에서 시작된다. 왕벚꽃이 화려한 꽃망울을 터트릴 무렵에 ‘영암왕인문화축제’가 열린다. 봄 축제 가운데 꽃 대신 인물이 주인공인 축제는 ‘영암왕인문화축제’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왕인박사를 기리는 축제지만 화려한 벚꽃의 향연을 놓칠 수 없다. 새하얀 왕벚꽃이 백리 길을 따라 최고의 꽃길을 선사한다.


< 영암 백리 벚꽃길 >

일찍이 영암은 백제시대부터 중국과 일본을 잇는 교역 거점으로 선진 문물이 오갔던 국제도시였다. 그 시절 영암에서 태어난 왕인박사는 일본의 아스카 문화를 꽃피운 선각자이자 백제와 일본의 가교 역할을 했던 외교사절이었다.

‘영암왕인문화축제’는 1600여 년 전에 일본 천황의 초청으로 천자문과 논어를 들고 영암 상대포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학문의 시조가 된 왕인박사를 기리는 지역 축제이다. 축제가 열리는 주요 무대는 왕인박사유적지와 상대포 역사공원, 그리고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구림마을이다.


백리에 걸쳐 펼쳐진 벚꽃 구경과 함께 다양한 전통 행사와 즐길 거리가 축제의 흥을 돋운다. 영암왕인문화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일본으로 떠난 왕인박사 행렬을 재연한 ‘거리 퍼레이드’이다. 당시 전통 의상을 차려입고 가장행렬에 나선 영암 군민들과 국내외 관광객 5천 여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퍼레이드로 백리 왕벚꽃길을 따라 상대포구까지 이어진다.


< 영암왕인문화축제 거리 퍼레이드 >


왕인박사를 비롯해 걸출한 인사들이 태어난 곳은 백리 벚꽃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구림마을이다. 조선 후기 지리서 택리지에 “월출산 남쪽에는 월남 마을이 있고 서쪽에는 구림이라는 큰 마을이 있는데, 둘 다 신라 때부터 명촌이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먼 옛날부터 호남 명촌으로 인정받은 구림마을은 월출산 주지봉을 주산으로 장장 2천 2백여 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일본고대문화의 시조 왕인박사를 비롯해 풍수도참사상과 불교 중흥에 힘쓴 도선국사, 그리고 고려 건국의 일등공신인 최지몽과 광주 목사 임구령이 모두 구림마을 출신이다.


< 영암 구림마을 >

구림마을은 열 두 개의 마을이 모여 대촌을 이루고 있다. 낭주 최씨, 함양 박씨, 연주 현씨, 해주 최씨, 창녕 조씨, 선산 임씨 등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는데 ‘비둘기 구(鳩) 수풀 림(林)’의 마을 이름에는 도선국사의 탄생 설화가 담겨있다.

성기동 구시바위에서 최씨 성을 가진 한 처녀가 빨래를 하다가 푸른 오이가 떠내려 온 것을 먹고 아이를 가졌는데 혼인하지 않은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숲속 바위에 아이를 버렸다고 한다. 며칠이 지난 후에 바위에 가보니 비둘기 떼가 아이를 보살피고 있었고 그 아이가 풍수지리의 대가이자 고려 건국을 예언했던 도선국사다. 그 후 아이가 버려졌던 바위는 ‘국사암’, 그 숲은 ‘구림’이라 부르게 되면서 마을 이름이 탄생했다는 전설이다. 현재는 구림마을 중심에 국사암이 있는데 대문 안쪽에 국사암이 있다 보니 쉽게 눈에 띄지는 않는다. 마을 주민의 안내를 받거나 지도를 펼치고 꼼꼼히 찾아가야 볼 수 있다.


수천 년 전에 바닷길이 이어졌던 구림마을에는 상대포구와 아천포구가 있었는데 조선시대 왜구들이 몰래 들어와 농작물을 약탈하기도 하고, 조선 수군이 잠시 머물다 가던 포구마을이었다고 한다. 당시 이순신 장군도 이곳에 들러서 며칠간 머물다 가곤했는데 그때마다 마을 사람들이 조선 수군들을 잘 대접했다고 한다. 특히 연주 현씨 가문은 군량미와 군수품을 지원해주며 이순신 장군과 깊은 연대를 맺었는데 이순신 장군이 현씨 문중에 보낸 감사 편지가 지금까지 죽림정에 남아있다.

현재 연주 현씨 종갓집 앞마당에 자리한 죽림정은 종손이 관리하고 있으며 방문객들을 위해 무료로 개방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이 남긴 유명한 글귀인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始無國家 : 만약 호남이 없다면 조선은 존재할 수 없다)’가 적힌 편지와 함께 죽림정을 다녀 간 삼정승의 글씨와 초상화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구림마을은 조선이 배출한 명필 한석봉과의 인연도 깊다. 한석봉이 일곱 살 때 스승 신희남이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 영암으로 낙향했을 때,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여러 스승에게 배우게 하기 싫다면서 신희남의 뒤를 따라 영암으로 내려왔다.  

한석봉이 글 공부를 하는 동안 어머니가 떡 장사를 했던 곳이 구림마을이다. 한석봉이 어머니와 함께 그 유명한 ‘떡 썰기 대 글씨 쓰기 시합’을 했던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한석봉은 17년 동안 영암에서 공부한 후에 진사시험에 합격했는데, 그가 영암을 떠나면서 함양 박씨 문중에 남긴 육우당(六友堂) 현판 글씨가 원본 그대로 걸려있다.


구림마을에는 조선시대 가슴 아린 로맨스도 숨어 있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의  자시는 창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 잎 곧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조선시대 재주 많던 명기로 이름을 떨쳤던 홍랑은 고죽 최경창에게 ‘묏버들 가려 꺾어라는 사랑 고백을 보냈다. 문헌공의 18 후손인 고죽 최경창 선생은 백관훈, 이달과 함께 조선시대 ‘3당시인으로 불렸는데 기생과의 사랑이 빌미가 되어 파직까지 당했다.

하지만 고죽은 ‘홍랑에게 주는  자신의 문집에 떳떳이 남겼다. 신분을 넘어 뜨거운 사랑을 했던  사람을 기리기 위해 구림마을에는 고죽시비와 홍랑가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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