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넷째 주 남도여행
한 해의 마지막 여행을 고르는 일은 쉽지 않다. 그렇게 열심히 다녔건만 아직 가보지 못한 여행지가 많이 남아있고, 또 일 년을 마무리하는 때인 만큼 의미 있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기 때문이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시작과 끝이 공존하는 여행지를 골라봤다. 12월의 마지막 주, 열심히 달려왔던 길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길을 바라볼 수 있는 멋진 여행길이 남해바다 여수에서 기다리고 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다도해국립해상공원과 한려해상국립공원이 맞닿아 있는 여수는 아름다운 항구도시로 이름난 곳이지만 알고 보면 섬의 도시다. 천사섬 신안만큼은 아니지만 유인도와 무인도를 합해서 무려 365개의 섬을 품고 있다. 여수와 고흥을 잇는 연륙·연도교 사업이 활발하게 추진되면서 섬과 섬들이 하나의 길로 이어지고 있는데 특히 여수 돌산에서 고흥 영남까지 총 39.1km의 길로 연결된 <백리섬섬길>이 남해바다 해양관광 랜드마크로 주목받고 있다. 여수에서 고흥 간 거리인 ‘백리(100리)’에 섬과 섬을 잇는 길이라는 순우리말 ‘섬섬길’을 더한 <백리섬섬길>은 2028년 완공을 목표로 11개의 해상 교량이 건설 중이다. 현재 여수 백야대교에서 고흥 우주발사전망대가 있는 팔영대교까지 개통되면서 하나의 길로 이어져 있는데, 올해 마지막 여행은 여수가 야심차게 만든 <백리섬섬길>을 따라 즐겨보자.
<백리섬섬길> 여행에 앞서 코스 설정은 필수다. 어느 방향으로 달릴지, 어디서 무엇을 볼지 결정하려면 다리의 스펙부터 차근차근 훑어봐야 한다. 2020년까지 개통한 다리는 조화대교(화양~조발), 둔병대교(조발~둔병), 낭도대교(둔병~낭도), 적금대교(낭도~적금)다. 2016년에 개통한 팔영대교(적금~고흥)까지 합치면 총 길이 12km로 약 20분 남짓 달릴 수 있는 드라이브 코스가 만들어졌다.
여행코스는 여수에서 고흥 방향으로 잡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수를 찾는 사람이 더 많기도 하지만 다리 이름을 통해 다음 넘어갈 섬 이름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뱃길 대신 찻길로 다도해의 멋진 풍광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백리섬섬길>은 남해바다의 명품 해양관광도로답게 그 인기가 날로 높아지고 있는데 특히 일몰 무렵의 노을 풍경이 장관이다.
여수 화양면에서 고흥 영남면까지 다리로 연결된 섬은 모두 네 곳이다. 조발도와 둔병도, 낭도와 적금도까지 각 섬들마다 아름다운 다도해 풍광을 자랑하며 <백리섬섬길>을 찾은 여행자들에게 넉넉한 품을 내어주고 있다. 특히 여우를 닮은 섬 ‘낭도’는 섬섬길에서 가장 큰 섬이자 가장 인기가 많은 곳이다. 다리가 놓이기 전부터 백패커들과 낚시 여행객들이 자주 찾았던 낭도는 섬섬길 개통과 함께 육지와 가까워졌다. 여수항에서 뱃길로 한 시간 넘게 걸렸던 길이 여수 화양면에서 출발하는 찻길로 10분이면 도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낭도는 섬을 한 바퀴 둘러볼 수 있는 ‘낭만 낭도 둘레길’을 따라 트래킹 여행을 즐기기에 좋다. 둘레길은 총 12km로 천천히 섬을 구경하면서 걸어도 하루면 충분한 거리다. 둘레길은 포구가 있는 선창마을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은데 다리가 없을 때 육지와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에 각종 편의시설이 집중되어 있다. 선착장은 낭도산 등산로가 시작되는 출발점으로 사도가 보이는 쉼판터 전망대와 등산로 3개가 교차하는 역기미 분기점을 지나 낭도산 최고봉인 상산(278.9m)으로 이어진다. 등산로 입구가 상산과 먼 탓에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데, 길 폭이 비교적 넓고 가파른 구간이 적어서 초보자도 쉽게 오를 수 있다. 그렇게 섬 둘레길을 따라 상산 봉화대에 오르면 낭도 앞바다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키 큰 나무에 가려 탁 트인 전망을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백리섬섬길>을 이루는 여러 섬들과 함께 조화대교, 둔병대교, 적금대교의 모습은 또렷이 볼 수 있다. 각 교량의 생김새를 비교하며 지나온 길을 굽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바다를 곁에 두고 사박사박 걷는 ‘낭만 낭도둘레길’ 1~2코스는 백사장이 길게 뻗어 있는 장사금 해변과 괴석 위에 홀로 자리한 남포등대 등 볼거리가 풍부하다. 백미는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천선대와 신선대다. 천선대는 퇴적층이 겹겹이 쌓여 기암절벽을 이루고 신선대는 주상절리와 해식동굴이 어우러져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신선이 살만한 곳’이라는 이름의 의미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절경이다. 천선대에서는 썰물 때 모습을 드러내는 공룡 발자국 화석이 남아있다. 수백만 년 전, 낭도 갯바위를 걸어 다녔을 공룡들을 상상하면 짜릿한 기분마저 든다.
낭도는 작은 섬이지만 바다 여행의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다. ‘산타바오거리’로 불리는 모래 해변은 여름 피서지로 인기가 높은데 이국적인 이름과 달리 전형적인 한국 해변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알고 보니 스페인말처럼 들리는 ‘산타바오거리’라는 이름의 원래 뜻은 ‘산사태가 난 바위’라고 한다. 낭도 주민들이 산사태를 ‘삼태’, ‘산태’로 발음해 오다가 지금의 ‘산타바오거리’가 됐다는 것이다. 멋진 비경을 자랑하는 해안절벽 사이로 고운 모래사장이 펼쳐진 곳에 장사금 해수욕장이 자리 잡고 있는데 여름이 아니더라도 바다 경치를 즐기기에 좋은 해변이다.
낭도에는 무려 3대에 걸쳐 전통 막걸리를 빚어 온 술도가가 있다. 백 년 가까이 집안 대대로 이어 온 비법 그대로 술을 빚고 있는데 직접 만든 누룩과 암반수에서 솟아난 젓샘 샘물로 맛을 낸다. 달큰하면서 신 맛이 살짝 어우러진 낭도 막걸리는 서대회무침과 찰떡궁합이다. 막걸리 식초로 새콤달콤하게 무쳐 낸 서대회무침에 진한 막걸리 한 사발이면 누구나 낭도 팬이 되고 만다.
노을 맛집으로 소문난 <백리섬섬길>에서 단연 최고를 자랑하는 일몰 명소는 낭도와 적금도를 잇는 길이다. 길 어디에서나 멋진 일몰을 만날 수 있지만 편안하게 노을을 즐기고 싶다면 일몰 시간에 맞춰 적금도 전망대에 자리를 잡고 기다리면 된다. 쪽빛바다를 붉게 물들인 노을을 배경 삼아 다도해 사이로 떨어지는 해를 보고 있노라면 이너피스, 마음의 평안이 찾아온다.
<백리섬섬길> 여행을 1박 2일로 잡았다면 팔영대교는 꼭 건너가 보자. 적금도를 출발한 팔영대교가 고흥 땅을 밟는 곳에 고흥 우주발사전망대가 기다리고 있고, 그 옆으로 요즘 한창 인기가 많은 남열해수욕장이 맞닿아 있다. 우주발사전망대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남열해수욕장은 전국 서퍼들이 사랑하는 파도타기 명소다. 해변 숲속에 캠핑장이 있고 펜션까지 갖추고 있어서 숙박의 어려움은 없다. 파도 소리와 함께 겨울밤의 낭만을 즐겼다면 이튿날 동 트기 전에 해변으로 나가보자. 드넓게 펼쳐진 남열 해변 위로 떠오른 해는 새벽잠이 아쉽지 않을 정도로 벅찬 감동을 선사한다. 한 해 동안 열심히 살아온 나를 위로하고 새로운 일 년을 다시 열심히 달릴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