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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지현 Nov 26. 2021

회사 생활이 이렇게 즐거운 거였나요?

N개월차 개발자의 회사 생활

나는 대학에서 취업 시장에서 핫하다는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다. 심지어 내가 처음 취업했을 때보다 지금은 이 분야가 훨씬 더 핫해졌지만, 취업을 노리고 이 전공을 선택한 건 아니었다. 정말 코딩이 좋았다. 처음 배울 땐 외계어인가 싶었던 코드가 점점 이해되기 시작하면서 내가 적은 코드 몇 줄로 웹사이트가 작동하고, 게임이 만들어지고, 조그만 LED 전구가 깜빡일 때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짜릿함이 느껴졌다. 그렇게 대학생 때 코딩의 재미에 빠진 나는 졸업 후 어서 회사에 가서 진짜 개발자로 일하기만을 기다렸다.


인턴쉽을 거쳐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회사는 IT 회사였다. 코딩 위주로 배웠던 대학생 때는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면 다 코드를 쓰는 개발자가 되는 줄 알았는데, 막상 회사에 들어와 보니 개발자 말고도 정말 다양한 기술 직무가 있었다. 데이터를 관리하는 DB 전문가, 인터넷망을 관리하는 네트워크 전문가, 코드가 돌아가는 서버를 관리하는 서버 전문가 등.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내가 이 중 어떤 업무를 맡을지는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었다. 회사에서 정해줬다.


인턴 시절부터 "코딩이 좋아요"라고 떠들고 다니며 어필한 덕인지 다행히 원하던 개발자 직무를 맡게 되었고, 사수로 배정된 H과장님을 따라다니며 열심히 일을 배웠다. 과장님을 따라 회의에 들어가면 어려운 약어들이 마구잡이로 쏟아지곤 했는데, 분명 한국어로 얘기하고 있으나 한국어가 아닌 것처럼 이해가 안 됐다. 기술 용어는 그렇다 쳐도 여기 사람들은 왜 하나같이 한국어로 얘기해도 될만한 내용을 영어 약어로 얘기하는 건지 의문이었다.


"우리 팀의 R&R(Role and Responsibility)을 정의해 봅시다." → "우리 팀의 역할과 책임을 정의해 봅시다."

"이건 언제까지 Follow Up 하면 될까요?" → "이건 언제까지 알아보고 회신드리면 될까요?"

"ASAP(As Soon As Possible) 해주시면 됩니다" → "최대한 빨리 해주시면 됩니다."

대충 이런 식이다. 내가 모르는 직장인 언어 사전이라도 있나 싶었다.


직장인 언어 사전의 앞부분 몇 장을 외웠을 때쯤이었나. 어느 정도 일을 배우고 나서는 작은 기능부터 혼자 맡아서 개발해 보기 시작했다. 무슨 기능을 맡을지는 사수 과장님이 정해 주셨는데, 기능을 하나하나 개발할 때마다 숙제 검사를 받는 초등학생 같은 마음으로 내가 개발한 기능을 과장님께 보여드렸다. 내 숙제를 보고 과장님이 잘했다고 칭찬이라도 해주시면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은 아이처럼 기뻤다. 학교 다니는 초등학생은 숙제가 끝나면 쉬면 되지만, 돈 받고 회사 다니는 직장인은 숙제 하나가 끝나면 다른 숙제를 받는다. 의욕이 넘쳤던 신입사원 시절 나는 그런 끝없는 숙제가 싫지 않았다. 심지어는 숙제가 재밌기까지 했다. "이거 다 했어요, 일 더 주세요!"를 외치며 더 많은 숙제를 받아냈다.


팀원들과도 금세 친해졌다. 신입사원이 몇 년간 안 들어왔던 팀에 스물네 살짜리 열정 뿜뿜 사원이 입사하니 팀 선배들은 나를 무척이나 귀여워했고, 그게 내심 좋았던 것 같다. 몇 달 전만 해도 학교에서 고인 물이었던 나는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 애기로 다시 태어났다(?). 모든 게 서툴렀던 나의 실수 하나하나는 선배들에게 재밌는 에피소드가 되었다. 한 번은 회사에서 쓸 모니터를 주문하려는데 몇 인치를 사야 할지 몰라서 옆자리에 있는 모니터를 자로 재서 주문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배송받고 보니 생각보다 훨씬 작은 게 아닌가?


"왜 이렇게 작은 모니터를 샀어?"


주섬주섬 모니터를 꺼내다가 당황한 나를 보고 팀 선배가 물었다. 모니터 가로 치수를 자로 재서 주문한 거라고 말했더니 선배는 한참을 웃었다. 알고 보니 모니터 치수는 대각선으로 재는 건데 내가 그걸 모르고 가로로 재서 19인치 모니터를 주문하고 24인치의 사이즈를 기대했던 것이었다. 직접 모니터를 주문해 본 적이 없어 생긴 에피소드였다. 이 사소한 해프닝은 많은 팀원들을 웃게 했고, 나는 매번 도움만 받던 선배들에게 이렇게 웃음이라도 줄 수 있어서 내심 기분 좋았다.


몇 개월 만에 하고 싶었던 일도 많이 배우고 팀원들과도 친해진 나는 회사 생활이 너무 즐거웠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게 행복했다. '자고로 회사 생활은 괴로운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많은 사람에게 내 회사 생활에 대한 만족감은 놀라움의 대상이었다. 회사 선배들도, 같은 날 입사한 동기들도 나만큼 회사 생활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수 과장님은 몇 달만 지나도 만족감이 떨어질 거라고 예견하셨지만 나는 그 예견이 빗나가길 바랐다. 다시 돌아보면 그 예견은 부분적으로 맞기도, 부분적으로 빗나가기도 했으나 앞날을 몰랐던 그때는 마냥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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