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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지현 Dec 03. 2021

팀 막내의 부캐 생활

본캐는 사원, 부캐는 N개

"커피 ㄱㄱ?"

"ㅇㅋ 엘리베이터 앞에서 봐"


나에게는 졸리면 불러내서 같이 커피를 마실 입사 동기가 둘 있었다. 같은 건물, 같은 층의 다른 팀으로 배치된 동기 A와 S는 나의 커피 동지이자 메신저 동지, 그리고 회사에서 존칭을 붙여서 부르지 않는 유일한 존재였다. 신입사원 교육부터 각 팀의 막내로 배치되기까지 모든 과정을 쭉 함께한 우리는 같은 막내로서의 동지애를 느끼며 금세 친해졌다. 종종 커피를 핑계로 모여서는 회사 얘기, 연애 얘기, 주식에 투자했다가 망한 얘기까지 다양한 주제로 수다를 떨었다. 그러고 다시 각자의 몫을 하기 위해 사무실에 올라가 컴퓨터 앞에 앉았다. 나까지 셋, 우리는 신입사원 삼총사였다.


팀의 막내들은 본업 외에도 해야 할 일이 몇 가지 있었다. 사원이라는 본캐 외에도 몇 가지 부캐가 있다고 하면 이해가 쉬우려나. 막내의 첫 번째 업무는 사무실에 배치된 커피믹스와 사무용품을 주문하는 일이었다. 적절히 지켜보다가 재고가 곧 떨어질 것 같으면 회사 사무용품 사이트에서 새로 주문을 넣고, 배송이 오면 포장을 뜯어서 배치해두는 작업이었다. 입사 초반에는 업무를 배우는 게 어려워서 비교적 쉽고 간단한 이 일이 반갑게 느껴졌다. 사무용품을 주문할 때 내가 좋아하는 고급 삼색 볼펜을 평소보다 더 많이 주문해서 제일 먼저 몇 개 챙겨둘 수 있는 혜택은 덤이었다. 하지만 깜빡하고 재고가 떨어질 때까지 주문을 못 한 날에는 선배들이 "커피믹스가 없네" 하고 한 마디씩 하며 지나갔고, 그럴 때면 동기 채팅방에 "커피믹스 있는 사람?"하고 SOS를 보냈다. 그러면 둘 중 한 명은 보통 여유분이 있어서 동기의 도움으로 우리 팀 커피믹스가 배송되기까지 급하게 수혈할 수 있었다. 이렇게 사무실의 재고를 책임지는 '사무용품 담당자'가 우리의 첫 번째 부캐였다.


막내의 두 번째 업무는 팀의 회식 장소를 고르는 일이었다. 팀장님이 "우리 다음 주 목요일에 회식하자" 하고 회식 선언을 하시면 그때부터 회식 장소를 물색하고 팀원들에게 공지하는 것이 막내의 임무였다. 회식 장소를 고를 때는 고려해야 할 점이 몇 가지 있다. 팀 전체가 하는 회식의 경우 3~40명의 팀원을 모두 수용할 공간이 있는 곳인지 확인해야 하고, 보통 회식에서 사람들이 술에 많이 취하면 시끄러워질 수 있으므로 방을 잡을 수 있거나 한 층을 다 쓸 수 있으면 더 좋다. 음식의 맛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유명한 맛집은 예약이 어려울 수 있어서 최대한 빨리 예약을 확보하는 건 필수다. 이렇게 여러 가지 조건을 만족하는 식당을 찾기 위한 제일 효과적인 방법은 동기들과 정보를 교환하는 것. 각자 검색으로 찾은 식당과 팀 선배들이 알려준 식당 몇 곳을 추려서 알짜배기 정보를 공유했다. 최근에 동기네 팀이 회식으로 간 식당에서 팀원들 반응이 굉장히 좋았다는 후기가 있다면 그 식당은 강력한 후보가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우리만의 베스트 식당 DB 중에서 엄선해서 회식 장소를 고르고, 팀원들에게 회식 시간과 장소를 공지하는 '회식 플래너'가 우리의 두 번째 부캐였다.


그 외에도 '회식 플래너'의 연장선인 '송년회 플래너', 시즌제로 돌아오는 '워크숍 기획자' 등 다양한 부캐가 있었다. 본캐로서는 각자 다른 일을 하지만 부캐로서는 같은 일을 했던 우리는 신입사원 교육을 받을 때와는 다른 깊이의 동지애를 느꼈다. 일이 많지 않던 입사 초반에는 이런 부캐 생활이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점점 본캐로서의 업무가 늘어나면서 부캐로서의 역할은 조금씩 귀찮은 일이 되기 시작했다. 그때쯤 희소식이 들려왔다. 우리 팀에 인턴이 들어온다는 소식이었다. 부캐 몇 개쯤은 나눠줄 수 있는 후배가 들어온다는 소식에 나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동기들 팀에는 인턴이 들어온다는 얘기가 없어서 동기들은 나를 무척 부러워했다.


얼마 뒤 우리 팀에 들어온 인턴 L은 아직 졸업도 안 한 대학생이었다. 나처럼 대학을 졸업하기 전 방학을 활용해 인턴쉽을 하게 된 경우였다. 서울대생이라는 스펙에 상반되게 얼굴에 '어리바리'라고 쓰여 있는 듯했던 그는 첫날부터 엄청 긴장했는지 꼿꼿한 정자세로 자리에 앉아 있다가 사람들이 지나가면 벌떡 일어나 90도로 인사를 했다. 자세가 엄청 곧아서 신기했는데 나중에 들은 바로는 L이 해병대를 나왔다고 한다. 항상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있던 그를 보면 각 잡힌 예의 바름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듯했다. 같이 커피를 마시다 한 선배가 취미가 뭐냐고 물었더니 L이 "독서랑 영화감상이요"라고 말해서 물어본 선배가 너무 뻔한 대답을 하는 것 아니냐며 웃었는데, 알고 보니 정말 독서와 영화감상을 좋아해서 그의 왓챠 피디아 계정에 있는 영화 평점이 400개가 넘을 정도였다. 인턴 생활 내내 '바른생활 사나이'의 아우라를 풍기던 그를 보며 이런 후배라면 나의 부캐를 믿고 맡길 수 있겠다는 생각에 흐뭇했다.


6개월이 지난 뒤 L은 대학을 졸업하고 우리 팀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했다. 입사한 지 1년이 지나고 처음으로 맞이한 금싸라기 같은 후배였다. L이 입사할 때는 신입사원을 비교적 덜 뽑았던 시기여서 그는 우리 건물에 동기 하나 없이 홀로 배치됐다. 내 회사 생활에 큰 힘이 되어준 동기들이 L에게는 없다는 게 짠해서 내 동기 A와 S를 소개해줬다. 우리가 그의 동기가 되어주고 싶었다. 선배인 우리가 불편하게 느껴질까 걱정돼서 우리를 동기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대하라며 당부했지만, 바른생활 사나이 L이 선배를 동기만큼 편하게 대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느리게나마 마음을 열기 시작한 그가 졸릴 때면 먼저 커피를 마시자고 제안하기도 하고, 막내의 부캐 생활에 대한 고충을 솔직하게 나누기도 하는 모습에서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삼총사에서 사총사가 되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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