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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지현 Dec 30. 2021

퇴사는 처음이라

나 혼자 하는 회사 졸업식

신입사원 때부터 3년간 회사 생활을 함께했던 나의 첫 사수 과장님은 그 3년 안에 차장님이 되셨고, 내가 대리 진급을 하기 한 달 전 이직에 성공해 퇴사하셨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퇴사한다는 말을 자주 했던 차장님이지만 이 회사를 15년 넘게 다녔는데 아직 퇴사를 안 하신 걸 보면 아마 조금은 더 오래 계시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다. 막상 진짜 퇴사한다고 얘기하시는 걸 들으니 더 이상 차장님과 함께 일할 수 없어 아쉬운 마음과 15년 만의 이직에 성공하신 걸 축하하는 마음이 교차했다. 학교에서는 함께 공부한 친구들과 모두 같은 날에 졸업하지만, 회사에서는 함께 일한 동료들이 각자 다른 시기에 졸업한다. 사수 차장님은 15년 만에 이 회사를 졸업하셨고, 나는 3년 만에 졸업을 결심했다.


영국 워킹홀리데이 합격 이후 나는 서서히 영국에 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워킹홀리데이에 합격했다는 것은 비자를 받을 수 있는 정부후원보증서(COS)를 지급해준다는 뜻이고, 실제 비자를 받으려면 정식 비자 신청 과정을 마쳐야 했다. 고맙게도 먼저 이 과정을 겪은 많은 워킹홀리데이 선배들이 친절하게 블로그에 정보를 남겨줘서 큰 어려움 없이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결핵 검사 ✔

은행 잔액 증명서 발급 ✔

온라인 비자 신청서 작성 ✔

비자 인터뷰 ✔

비네트(임시 비자) 수령 ✔


가장 어려운 일은 마지막에 남아 있었다. 바로 회사 사람들에게 퇴사를 알리는 일이었다. 3년 반 동안 함께 해온 팀원들이었기에 정이 많이 들었고, 퇴사는 처음이라 어떻게 얘기를 꺼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게다가 오랜 기간 함께 일하셨던 사수 차장님이 몇 달 전 퇴사하신 상황이라 나까지 퇴사한다고 말하기가 미안한 상황이었다. 첫 사수 차장님의 퇴사 후 나의 새 사수가 되신 A과장님은 이런 얘기를 꺼내기가 정말 미안하리만큼 친절하고 후배에게 잘해주는 분이었다. 그래도 비자까지 받은 마당에 어서 얘기를 꺼내야 하는데 하며 타이밍만 엿보고 있었는데, 그때 A과장님이 꿈에 나왔다. 꿈에서는 용감하게 과장님께 퇴사 소식을 알렸다.


"그런 얘기를 왜 이제야 해?"


예상치 못하게 꿈속의 과장님은  진작 얘기하지 않았느냐며 배신감이 든다고 노발대발하셨다. 실제로는 전혀 그런 말을  성격이 아니셔서 꿈인 것을 의심해  만도 했지만, 그런 생각을  새도 없이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변명했다. 어버버버 둘러대다 꿈에서  이게 현실이 아님에 안도했고, 그날 당장 과장님께 말씀드려야겠다고 결심했다.


“영국에 가려고요.”


그날 바로 과장님과 따로 커피를 마시러 가서 냅다 질러버렸다. 영국에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갈 예정이고, 한 달 반 뒤에 퇴사할 거라고 말씀드렸다. 원래 회사 규정상 퇴사하기 한 달 전에만 얘기하면 되지만 악몽까지 꾼 나는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나는 이런 대화가 처음이라 이 상황이 엄청 어색하고 불편했으나, 내가 악몽을 꾼 게 무색할 만큼 과장님은 나의 퇴사 소식을 담담하게 받아들이셨다. 엄 대리는 영국에서도 잘할 거라며 응원의 말도 덧붙여 주셨다. 내 꿈과 다르게 너무나도 따뜻하게 반응해주신 과장님 덕분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다른 동료들에게도 부지런히 퇴사 소식을 알렸다. 퇴사 소식이 어느 정도 알려지기 시작하면 회사에 빠르게 소문이 나는데, 친한 동료들에게는 소문으로 알려지는 것보다는 직접 얘기하고 싶어서 커피를 마시자는 핑계로 한 명씩 불러냈다. 동료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갑자기 영국?"이라며 의아해하는 반응부터 "그런 결정을 하다니 멋지다"라는 부러움이 섞인 반응, 그리고 "집은 어떻게 해?"와 같은 현실적인 걱정까지. 그러면 나는 "집은 월세 구하면 되죠" 하며 허허 웃었다. 대부분의 동료들은 나의 퇴사를 아쉬워하면서도 영국에서의 앞날을 응원해주었고, 이런 동료들의 반응을 보며 ‘지금껏 회사 생활 참 잘하고 가는구나’라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퇴사할 때는 시원섭섭한 감정이 든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영국에 갈 생각에 들뜬 나는 시원 90%, 섭섭 10%의 마음으로 퇴사를 결정했는데, 막상 퇴사일이 가까워질수록 떠난다는 게 점점 실감이 나면서 시원보다는 섭섭의 비중이 더 커졌다. 그냥 회사를 나가는 게 아니라 아예 당분간 한국을 떠나는 것이었기에 더 그랬다. 영국 음식은 맛이 없다며 맛집에 데려가 밥을 사준 동료, 타지에서 아프면 서럽다며 홍삼 세트를 퇴사 선물로 챙겨준 동료, 본인이 아는 영국의 핫플레이스를 손 편지로 적어준 동료까지. 그런 동료들과 조금이라도 더 잘 인사하고 가려고 매일 부지런히 동료들을 만나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눴는데도 떠날 때가 되니 뭔가 아쉬움이 남았다. 마지막 날 짐을 싸고 나오며 동료들에게 인사를 하는데, 울먹이며 손을 흔드는 후배를 보고 나도 모르게 울컥해버렸다. 하지만 마지막 모습을 우는 얼굴로 남기고 싶지는 않았기에 애써 눈물을 참으며 사무실을 나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함께 일한 동료들에게 퇴사 메일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IFS팀 엄지현입니다.
오늘부로 00에 입사한 지 딱 3년 5개월이 되었습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정말 많이 배우고 좋은 추억도 많이 얻고 갑니다.

글재주가 없어서 감사한 마음이 잘 전해질지 모르겠지만 저의 첫 회사 생활이 00이어서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좋은 선배님들, 동기님들, 후배님들 덕분에 정말 재미있고 뿌듯하게 회사 생활하고 갑니다.
어떻게 보면 무모한 저의 도전을 함께 응원해주신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00에서 배운 교훈을 깊게 새겨서 자랑스러운 동료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 메일을 받으시는 분들께는 특별히 런던 여행 가이드권을 드립니다.
런던 여행 계획이 있으신 분들, 저와 피쉬앤칩스를 함께 드시고 싶으신 분들은 따로 연락 주세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안녕, 나의 첫 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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