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온 후의 동네 평소와 다를 바가 없는 초여름 저녁.. 서늘함, 새소리, 숲너머 고속도로에서 들리는 차소리를 느끼며 문득 이 단어가 떠오른다. 이런 걸로 미뤄볼 때 나는 실존하는 게 틀림없다.
실.존.한.다.
영Exist
러Существовать
폴Istnieć
스 Existera, Befinna sig
우리는 눈 뜨고 자기 전까지 생산적이고 유익한 일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린다. 조급한 마음이 든다. 내 뒤를 쫓아오는 사람도, 야생 동물도 없는데 말이다.
우리는 결과물이나 생산성으로 그 가치를 증명받으려는 목적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런데 학교가, 사회 체계가, 이웃이, 우리를 위하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그렇게 가스라이팅을 해왔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그래서 맘속으로 더 크게 고함쳐 본다.
나는 실존한다.
너도 실존한다.
'우리는 귀하다.'
내가 인류의 언어활동을 좌우할 권한을 부여받는다면
"비록 가진 것이 없어도..."
"비록 타이틀이 없어도..."
"비록 잘생기지 않아도..."
"비록 나이가 어려도/많아도..."
등의 표현은 사용 금지, 인간이 주어일 때 서술부에 쓸모라는 단어 사용금지. 혹은 비추어와 표현 목록에 올려 가둬놓고 스스로 지쳐서 생명을 다 할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그 후에는 고어사전에 옮기고 싶다. "불과 몇십 년 전까지도 인류는 사람을 생산성이나 사회적 지위에 따라 그 가치를 매기는 악습이 있었다"라는 부연 설명과 함께.
그리고 동의어 사전에는 "존재한다: 문맥에 따라'귀하다', 혹은 '가치 있다'로 대체가능하다."를 등재시키고 싶다.
비록, 만약... 조건이나 가정이 없는
오롯한 단문이 진리이다.
모든 존재하는 인간은 귀하다.
그러니까 조금만 서로에게 예의를 갖추고 친절할 수는 없을까? 사소한 선의라 할지라도 고맙다고 하고, 의도치 않은 실수에는 미안하다고 하면 살기가 팍팍하지 않을 텐데 말이다.
사람들이 살아 숨 쉬고 먹고 입고 마시는 것만으로도 의도하지 않게 당신 명의의 계좌가 있는 은행 대차대조표에서 놀고 있는 그 숫자가 증가하는 데에 기여하는 바가 크니까 더 이상 논쟁하지 말라고.
따라서 그들의 잘못된 기준으로 봐도 모든 인간은 존재만으로도 크나 큰 가치를 창출한다. 그러니 토 달지 말라고.
나는 실존한다.
너도 실존한다.
그러니까 너도 나도 귀한 존재이다.
지금, 여기, 지나가는 무한대의 연속선 상 X경분의 일초의 순간들과 함께 우리의 의식과 감각도 흘러간다.
살아있음은 참 감사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