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에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을까? 얼굴 가린 그와 무릎 꿇은 그녀
자유시간은 단 하루였다. 이것저것 다 보느라고 분주하게 돌아다니면 기억도 인상도 남지 않는다. 선택과 집중을 한다면 어디에 가야 할까? 작전을 잘 세워야 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밥을 먹고 간 곳은 벨베데르 상궁. 9시 15분에 도착.
오전 내내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겐 쉴레의 그림을 보고, 정원을 보기로 결정했다. 그림 하나를 최소 10분 정도 자세히 구석구석 찬찬히 관찰하고, 붓터치와 재질에도 관심을 갖고 본다. 그러면 나와 다른 세대를 살다 간 화가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의 심정과 그림 속에 깃든 이야기를 알 수 있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된다. 그 후에 전문가의 설명을 듣는다. 이렇게 전시회에 가서 몇 개 작품을 집중해서 보면 편견도 없어지고 자신만의 감상도 가능하고, 스토리텔링도 되고 재미있다.
클림트의 작품세계는 낭만, 환상, 에로스 조합의 최절정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아래 작품 속에는 가시적인 에로스는 없다. 클림트의 수많은 다른 그림들과는 달리 두 주인공의 몸은 옷으로 꽁꽁 감싸여 있다. 게다가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그림을 구석구석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소 우습고 황당할 수도 있는 현실적 요소도 있다.
이 상황은 자신의 얼굴은 드러내지 않은 남주인공이 강행한 것이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여인의 오른팔이 남자의 어깨를 에워싸고 있다. 그림 속 키 큰 여인은 굳이 무릎을 꿇어서 남자와 키가 비슷해졌다. 혹은 남자의 키높이에 자신의 키를 맞추고 있다. 이들이 서 있는 곳은 실제로 형형색색 꽃과 잔디가 가득한 아름다운 낭떠러지 끝일까? 아니면 그림 속 주인공들, 혹은 그린 사람의 마음이 절벽 가장자리에 서 있는 것 같이 아슬아슬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런데 이 상황이 현실이었던, 상상이었던 그림 속의 그들이 있던 장소가 낭떠러지 끝이라고 해도 여기서 뛰어내려도 죽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이다. 황갈색 꿈속 같은 배경은 따스한 안정감을 주며, 오로지 주인공 두 명만이 환한 금빛으로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림 속 남. 녀 주인공들은 과연 누구일까? 실존 인물이었을까? 대다수 전문가들은 그녀가 에밀리 플뢰게라는 실존인물이라고 한단다. 클림트는 그녀와 헤어졌다가 만나면서 친구-연인 관계 반복했단다. 클림트와 함께 찍은 사진, 혹은 독사진 속의 에밀리 플뢰게는 실제로 다소 마르고 키가 큰 여인이며 당시 기준으로는 폭을 좁게 리폼한 드레스를 입고 자주 등장한다. 그림 속 여주인공도 실루엣을 보면, 화가 자신으로 보이는 남주인공이 폭넓은 가운과 달리, 오히려 폭이 좁은, 활동하기 좋게 단순하게 리폼한 옷을 입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남자가 입고 있는 가운이 당시 화가들이 입던 폭넓은 가운 작업복과 유사한 점, 머리 색깔도 화가 클림트와 같은 것으로 미루어 봐서 남주인공은 클림트가 자신을 모델로 그렸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클림트의 아버지는 금세공 기술자였단다. 실제로 그림을 보면 남자 주인공이 입은 가운에 촘촘히 보이는 작은 네모들이 각각 다른 색깔로 반사되어 보인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어깨너머로 보며 배운 기술을 활용해 정성껏 금가루를 듬뿍 섞어 작은 네모 하나하나에 상이한 색깔과 광채를 입혔는데, 이는 우리나라 칠보 공예를 연상케 한다.
훌륭한 그림에는 보이는 것들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하려는 화가의 노력이 느껴진다. 화가가 손길이 닿은 원작을 앞에서 보고 있으면, 활자로 인쇄된 명작소설이나 시를 독서할 때는 느낄 수 없는 친밀함을 느낄 수 있다.
작가가 이 그림을 어떤 심정으로 그렸을까, 이들의 관계는 어땠을까를 상상하면 하늘나라로 간 화가를 소환해 그의 구구절절한 사연과 고민을 듣고 있는 기분이다.
화가가 후원자의 경제적 지원에 의지했던 시대에 그림을 주문한 사람의 맘에 들게 그릴 수밖에 없었을, 아래와 같은 초상화들과 확연히 다르다. 주문제작의 대가로 돈을 받고 기한을 두고 그린 그림들. 화가 입장에서도 언젠가 떠나보내고 남의 것이 될 운명의 그림들과는 작업 시작 단계에서부터 그 깊이나 상징성이 다르다. 오늘 날로 치면, 고객, 혹은 셀카의 경우 본인의 마음에 들도록, 포토샵과 보정을 너무 많이 한 나머지 실물과 괴리가 커져 버린 프로필/전신사진이라고 볼 수 있을까?
벨베데르 측에서 방문자들이 플래시를 터트리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사진 촬영을 허락한 것은 참 은혜로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