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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지우 Sep 19. 2023

순종적인 내가 매력없다는 남자친구

당신은 존중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넌 너무 순종적이라 매력이 없어."

미안하다는 나의 바보 같은 말에 그가 내뱉은 말이다. 하트 모양의 빨간 입술을 못마땅하다는 듯 일그러뜨리면서 말이다. 


그날은 어린이날이었다. 동서울 터미널에서 오전 10시에 버스를 탔다. 공휴일을 너무 얕잡아봤다. 꽉 막힌 도로에 한참 동안 서 있었다. 원주에 있는 부대에 도착하니 오후 3시가 다 됐다. 남자친구는 모자를 푹 눌러쓴 채로 면회장에 나타났다. 눈이 보이지 않지만 부루퉁한 입술은 숨길 수 없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그가 묻는다.


나는 변명한다. 공휴일에 시외버스를 타본 적이 없어서 이렇게까지 막힐 줄 몰랐다고 했다. 

네 시간 넘게 버스 안에 갇혀 있던 사람은 나였는데, 왜 내가 변명하고 있는 걸까? 궁금해도 참았다. 


"아침부터 기다리는 사람 생각은 안 해?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이상하게 봤는 줄 알아?" 


요점은 이거다. 아침부터 내가 온다고 면회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작업도 빼줬는데, 사람들이 작업 다녀온 후에도 앉아있으니 다들 한 마디씩 했다는 거다. 어리둥절 했다. 동시에 이해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 가지 마음이 신나게 싸운다.  


"진짜 그 시간에 버스 탄 게 맞아? 늦게 일어나서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버스가 엄청나게 밀렸다니까. 나 멀리서 왔는데 이럴 거야?" 바보같이 웃으며 내가 말한다. 


"그게 오래 기다린 사람한테 할 말이야? 미안하다고 해야 되는 거 아니야?" 기가 막히다는 듯 그가 말한다. 


여기까지 와서 싸울 수는 없다. 진짜 딱 한 번만 더 참기로 한다. 

 "미안해." 

입술을 깨물며 내가 말한다. 그러자 그가 코웃음을 치며 이렇게 대답한다. 

"넌 너무 순종적이라 매력이 없어."


순간, 머릿속에서 펑하는 폭발음이 들렸다. 머리통이 통째로 불타오르는 느낌이었다. 

지금껏 그가 무슨 짓을 해도 참았다. 일주일씩 전화를 받지 않아도 참았다. 같이 있다가 내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말없이 집에 가버려도 참았다. 그 결과가 이거다. 일방적 희생으로 연결되어 있던 가느다란 인연의 끈은 그의 말 한마디에 완전히 불타 없어져버렸다. 

그가 무릎을 꿇었던 것도 같지만 확실하지 않다. 당시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가 나를 사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존중하지 않은 건 분명했다. 내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었기 때문이다. 


진작 말했어야 했다. 

나는 너의 존중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너에겐 나를 함부로 대할 권리가 없다고.


그 후로 그런 관계는 내 인생에 없었다. 누구도 나를 존중하지 않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효과가 있었다. 친구나 가족, 연인과 훨씬 더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로부터 일 년쯤 지난 어느날의 일이다. 아침부터 또다른 '남사친'의 면회를 가기 위해 정신없이 지하철역으로 달리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려 무심코 받았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엊그제 제대했다고 한다. 근처 카페라며, 올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한다. 대충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는 여전히 자기 중심적이다.

밤 11시가 다 돼서 집에 돌아오니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두툼한 편지봉투 하나를 불쑥 내밀더니 막차를 타고 사라진다. 뭐라고 쓰여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대로 버렸으니까. 


너는 나의 존중을 받을 자격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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