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마음과 사랑받고 싶은 욕구 사이
계속 속이 울렁거린다. 이를 악물어봐도 소용없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
그를 만난 이후로 계속 이런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씩 기억을 되짚어본다.
어제 그를 만났다. 고즈넉한 을지로 골목의 힙한 술집 앞, 창 너머로 그의 뒷모습이 보인다. 옅은 색으로 염색한 머리가 가지런하다. 토끼 그림이 그려진 흰색 후드티를 입었다. 그 나이에 어울리기 힘든 스타일인데, 찰떡같이 잘 어울린다.
레트로한 감성의 오비맥주잔이 반쯤 비었을 때, 그가 묻는다. "너는 MBTI가 뭐니?"
한번 맞춰보라고 휜다. 자기와 같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는 ENTJ다. 현재는 직관적으로 빠르게, 앞으로의 일은 꼼꼼하게 목록해놓는 사람. 눈앞의 일은 순식간에 쳐내면서도 해외 출장 갈 때면 30분 단위로 일정을 짜는 사람. 공감보단 능력, 사람보단 일이 중요한 사람.
"나는 INFP에요." 감정적이고, 무계획적인 인간. 행동이 먼저고 생각인 사람. 여러 번 이직한 것도 아무 계획 없었다고 털어놓는다. 견딜 수 없어 매번 충동적으로 떠났을 뿐이다. 다들 궁금해하니 적당히 이유를 둘러댔음을 고백한다. 그의 얼굴에 놀람이 퍼진다. 그는 누구보다 내가 회사를 떠나는 걸 슬퍼했었다.
잠시 말이 없다. 의미 없이 손바닥을 비빈다. 이마를 짚으며 얕은 한숨을 쉬며 말한다.
"오늘 보니 내가 널 잘 몰랐었다는 생각이 드네."
그 말에 속으로 중얼거린다. 당신이 모르는 내가 한참 더 남았다고.
술집을 나와 근처 와인바로 향한다. 낡은 인쇄소 건물로 들어서니 난간도 없는 시멘트 계단이 보인다. 입구까지 벽을 짚고 오른다. "여기서 넘어지면 죽음이겠는데?" 그가 웃는다.
포트와인과 치즈 플레이트를 주문한다. 달콤한 와인이 목으로 넘어가니 금세 취기가 오른다.
그는 아까 이야기를 계속한다. 자신이 몰랐던 나에 대해 되새김질하며 여전히 놀라는 중이다.
결국 말하기로 한다. 그가 모르는 나, 달의 뒷면 같은 나의 어둠에 대해.
"지난번 만났을 때 나한테 어릴 적 힘든 이야기를 했잖아요. 그래서 나도 오빠한테 나에 대해 조금 더 말해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
"내가 너한테 그런 이야기를 한 게, 비밀을 털어놔야 할 것처럼 느껴졌어?"
고개를 젓는다. 뭔가 이유가 있는데, 혀끝에서 맴돈다. 그때는 진심으로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라는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느덧 갈 시간이다.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는데 아쉬움이 밀려온다. 오늘 헤어지면 또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가 비틀거린다. 부축하려 손을 뻗으니 내 손을 꼭 잡는다. 텅 빈 마음에 무언가 차오르는 기분이 든다. 이 감정은 도대체 뭘까?
나이가 조금만 어렸어도 아마 그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이 마음은 그저 사랑받고 싶은 욕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가 아닌, 나를 좋아하기 때문에 생기는 마음이다.
사랑받고 싶다. 누구나 사랑받길 원한다.
누군가의 눈에 나 하나만 비치길 바란다. 이기적인 욕망. 순수한 본능. 누군가의 시선이 닿는 순간에만 나의 특별함을 느낄 수 있다. 구찌를 들 때 느끼는 자신감과 비슷한, 일종의 허영심이다.
나이가 들수록 그럴 기회가 적어진다. 회사와 집을 오가며 일과 육아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좁아진 세상은 나를 필요로 한다. 더 이상 욕망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지 않는다. 사랑받는다는 느낌. 마음이 통하는 느낌. 나라는 존재를 온전히 바라봐주는 시선을 욕망한다.
욕망이 채워지는 순간, 사랑이라 착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안다. 사랑받고 싶은 어린아이 같은 마음일 뿐이라는 사실을.
여전히 속이 울렁거리지만, 이해하고 나니 견딜만하다. 내 마음을 그대로 인정해 준다. 사랑받고 싶은 욕심은 당연한 거라고. 그 욕심을 따라 살다 간 결국 모든 것을 망칠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준다.
온전히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시선에 휘둘리지 않고, 충만하게 사는 방법임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