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날이 올 줄 몰랐다고?!
Apr 10, 2023
첫 번째 재판을 치르고 거의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오늘은 두 번째 재판의 날. 코로나 탓인지 이제는 재판도 가상으로 한다. 30분의 격렬한 입싸움과 기막힘을 뒤로한 채, 나는 진이 다 빠져 변호사의 사무실을 떠났다. 내가 30분 동안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이 끝이 없어 보이는 인신공격에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밖의 날씨는 20도 정도로 따뜻했고 정장 위에 트렌치코트까지 걸치고 밖에 나온 나는 한숨을 쉬며 무심하게 쨍쨍 내리쬐는 햇빛을 한 번 노려 본다. 터벅터벅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너무 무거웠다. 첫 번째 재판을 끝내고도 느낀 거지만, 그 후에 집으로 가는 발걸음은 한없이 무겁기만 했다. 어떻게 이 기분으로 집에 가서 아이를 마주할 수 있을까, 아니, 어떻게 이 기분을 리셋하고 다시 환한 얼굴로 아이에게 돌아갈 수 있을까... 그토록 낯설었던 싱글맘이란 단어가 갑자기 마음에 와닿으면서 내가 지금 그런 상황에 놓인 건가? 하고 다시 한번 나에게 되묻는다.
어제는 부활절이었다. 스태튼 아일랜드 (미국 뉴욕시의 5개 자치구 중 하나의 섬)에 살고 있는 딸아이 반 친구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 맨해튼에서 페리(무료 대중교통 보트)를 타고 한 30분 정도 가면 되는데 바람은 차가웠지만 역시 오랜만에 물을 봐서 그런지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너무도 친절한 딸아이의 친구 엄마는 우리를 역까지 마중 나와 주었고, 나는 딸아이가 한창 친구랑 집에서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보며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와 여유를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적어도 딸아이가 그 한 마디를 할 때까지는..."아빠가 나에게 새로운 친구 OO를 소개해준다고 했어. 그 아줌마는 패션 디자이너래. 내가 학교에서 듣는 패션 디자인 수업 숙제를 그 아줌마가 도와주기로 했어." 근처에 서서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같이 평화롭게 지켜보며 흡족해하던 딸아이의 친구 부모와 갑자기 눈이 마주쳤다. 그들의 파란 큰 눈동자의 동공이 지진 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침착하자. 침착해야 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상황을 언짢아하며 놀랍다는 듯이 대처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아무 영문도 모르는 딸아이에게 그런 인상을 심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여자친구라니... 아직 이혼준비를 시작한 지 6개월 밖에 되지 않았는데... 다른 이성을 사귀는 것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미국에서는 이혼소송 중이성을 사귀는 것이 사회적으로 비난받거나 흔하지 않은 일이 아니다), 아직도 엄마와 아빠랑 다시 같이 살 날을 그리워하며 매일 밤을 눈물로 지새우는 아이에게 지금 꼭 지금 여자친구를 소개해 준다고 말을 했다는 것 자체가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너무 이기적이고 괘씸하기까지 했다.
저녁에 아이와 집에 와 잘 준비를 할 때 다시 그 이야기를 조심히 꺼내보았다. 다행히, 아이에게 그 여자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분명히 아이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심지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빠와 친할머니네 그리고 엄마의 집, 세 군데를 왔다 갔다 하며 사는 두 가정의 삶을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하고 있어 보이는 듯하기도 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힘들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강하게 그리고 꿋꿋이 딸이 자라주고 있는 것 같아 너무 감사했다. 딸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딸아이의 패션 디자인 수업에 개입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 중에 (아빠의 가족들, 그리고 새 여자친구 포함) 왠지 내가 설 자리는 없어 보였다. 갑자기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세상의 전부였던 딸에게 이제는 내가 필요하지 않을 걸까.. '엄마도 내가 하는 이 프로젝트에서 잘할 수 있는 게 있으면 나 좀 도와줘...'라고 딸은 애써 덛붙여 말했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밀려들어오는 소외감에 주눅이 들기 시작했다. 내 자격지심인 걸까... 물론, 당연히 아빠랑 보내는 날에 듣는 수업이고 그래서 딸과 그 수업내용에 대해 자주 이야기 하지는 못했지만, 아빠의 패션 디자이너 여자친구의 도움을 받는 프로젝트에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단 한 가지도 없다니... 무엇인가 이루 말할 수 없는 허무함, 절망감, 배신감등 온갖 감정들이 밀려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내가 그동안 너무 오만했던 걸까. 이런 것들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지는 않았을 텐데... 아이에게는 내가 늘 항상 최고였기에 그게 바뀔 것이라는 생각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내 아이의 삶에 이렇게 빨리 다른 누군가가 비집고 들어올 수 있다는 것에는 너무 무방비상태였다. 그동안 내가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에게 신경을 더 써 주지 못했던 나 자신에게 조금 화가 나고 실망했다. 아이는 그동안 나와 더 연결되고 싶어 했고 늘 더 같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으며 우리가 둘이 같이 보내는 시간을 더 잘 활용해서 매시간 늘 즐겁게 보내고 싶어 했다. 내가 항상 아이에게 필요한 존재 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혹시 반대로 아이가 나에게 있어서 한없이 필요한 존재는 아니었을까... 자존심이고 자존감이고 뭐가 되었건 간에 죄책감에 파묻혀 한없이 구렁텅이로 빠져 내려가고 있는 나를 나는 억지로 끄집어내야 했다. 이런 상황을 나보다 더 침착하게 잘 받아들이고 누구보다 어른스럽게 잘 적응하고 있는 아이를 보며 한 없이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하면 슬기롭게 헤쳐 나갈 수 있을까.. ' 정답이 쓰여 있는 교과서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미련한 생각을 해 보며 잠을 청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