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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바라기 Feb 27. 2022

마우리치오 폴리니 쇼팽 에뛰드 그리고 해바라기

망각의 상자


마우리치오 폴리니가 2022년 5월 25일 내한한다고 한다. 1960년 18세의 나이로 쇼팽 콩쿠르에서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우승한 그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연주를 직접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내한 소식을 기사로 접하자 내가 소장하고 있는 한 장의 앨범을 떠올리게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여년 전 월드컵으로 뜨거운 여름을 보냈던 그 시절.  6월 생이었던 그녀는 생일선물로 쇼팽 에뛰드 마우리치오 폴리니 연주 앨범을 받았다. 여름에 어울리는 해바라기와 함께. 한 송이의 꽃과 CD를 손에 쥐어들고 설레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다. 에뛰드 Op10-8은 그 해 피아노 입시곡이었다. 넉넉지 않았던 가정형편에 피아노 입시가 웬말인가 싶었지만 그녀는 말도 안되는 상황에서 말도 안되게 입시준비를 했다.  영화 기생충에서 기택이 살던 집과 비슷한 구조의 집에 마치 보물마냥 업라이트 피아노가 작은 방을 꽉 채우고 있었다. 기택의 아내 충숙이 과거에 땃던 메달을 고이고이 모셔두고 있는 것마냥 그런 집에 피아노라니 그렇게 모순되고 생경한 장면을 만나기란 어려울 것이다. 여름철 장마에 하수구가 역류하여 작은 물난리가 나기도 하고 반지하 방이라 큰 방 창문을 열면 뒷마당의 시멘트 바닥이 시선에 닿았다. 


반지하방, 사춘기소녀, 피아노입시, 에뛰드 연습곡, 생일선물, 해바라기, 설렘...


그녀가 받아본 최초의 꽃 해바라기는 시간이 흘러도 쉬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 반지하 방에서 서서히 말라가던 해바라기는 생명력을 다하고 어디론가 버려졌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생생하게 노오란 빛깔을 반짝이던 

해바라기 한 송이의 기억은 날카롭게 남아있는 것이었다. 해바라기의 꽃말 '일편단심'을 되뇌이며 흘러나오는 쇼팽 에뛰드 연습곡을 감상하는 사춘기 소녀의 마음은 설렘 가득이었다. 그 나이에 왠지 어른이 하는 연애의 감정은 이런 것일까 상상해보기도 하고 주고받은 생일선물이 제법 어른스럽다고 생각하며 으스대는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그 해 피아노 입시는 보기좋게 -어쩌면 당연하게도- 실패하였고 보물 같은 피아노를 이고지고 그 반지하 방을 탈출할 수 있었다. 형편은 나아졌지만 여전히 불안정했고 미성숙했고 용기가 없었다. 시작할 수 있는 용기, 그만둘 수 있는 용기 모두가 필요했지만 어느 것 하나도 해내지 못했다. 인생에서 가정법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지만 잠 못 드는 밤이면 가만히 되뇌어 본다. 만약 그 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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