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명확하지 않음'을 새로운 가능성으로
1) "자기소개해주세요"라는 말은 내게 가장 두려운 질문이다. 살면서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는 게 어려웠던 적은 많이 없던 것 같다. 말하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학교나 직장 생활을 하면서 꽤 훈련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독 이 질문만 무섭다. 다른 사람들의 대답에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본업이 있고, 확실하고 뚜렷한 색깔이 있는 것처럼 들렸던 것 같다. 나는 형용사 하나를 고르는 것도 어려운데 말이다.
2) 이 고민은 어렸을 때부터 조금씩 있어왔던 걸로 기억한다. 누군가를 떠올리면 바로 생각나는 키워드가 없는 그런 학생이었던 것 같다. 과목별로 성적도 비슷비슷했고, 특별히 다른 걸 버리고서라도 올인하고 싶은 수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만의 특별하고 재미있는 특징이 있었으면 했는데, 생기부를 보더라도 이것저것 열심히 하고 친구들과 두루두루 친하다고 묘사된 적이 많았다. 하나의 단어가 없었다.
3) 성인이 되어서도 그대로였다. 그래서 이건 내가 우물 안 개구리라 그런 게 아닐까 싶어, 미친 듯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해 볼 수 있는 경험은 최대한 모두 시도하려고 노력했었다. 물론 내가 말하고 있는 건 면접 자리에서의 자기소개와는 다르다. 그건 의외로 쉬웠다. 면접관의 입장에서 생각해서 듣고 싶어 할 답변을 해주면 된다. 그런데 종종 소중한 사람들에게는 있는 그대로의 '진짜 나'를 설명하고 싶을 때도 있다.
4) 한동안은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나 자신 자체를 콤플렉스로 여기기도 했다. "나만의 특별한 한 가지는 뭘까?"라면서...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깨닫고 있는 게 있다. 내가 취향과 호불호가 없는 게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은 것들에 관심이 있었던 거다. 이것저것 새로운 것들을 경험해 보고 사람들을 통해 세상을 배우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 하나에만 빠지기보다는 여러 가지를 다 해보고 싶었던 거다.
5) 나는 몇십 명, 몇백 명 사이에서 신나게 노는 것도 좋은데, 혼자 고요한 장소에서 사색하고 책 읽는 것도 좋아한다. 여러 사람 속에서 활기찬 분위기를 만들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은데, 일대일로 누군가와 차분하고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아한다. 체계적으로 하나하나 전략과 계획을 세우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팀원들과 상상도 못 했던 결과를 만들어내는 그날의 벅참도 잊을 수 없다.
6) 어떤 환경이나 사람과 함께 하는지에 따라 바뀌는 내 자아에도 혼란스러운 적이 있었다. 농담 삼아 나 자신을 카멜레온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어쩌면 나는 정말 복잡하고 입체적인 존재가 아닐까 싶다. 아마도 이런 성격 덕분에,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상대방에게 맞춰주는 걸 잘하는 편인데, 이건 내가 수동적이어서 그런 것보다 진심으로 그 사람의 세계가 궁금했던 것 같다.
7) 진로 고민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제 경력도 쌓이고 대학생 티를 벗은 지 꽤 돼서, 방법을 모르는 건 절대 아니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잘 모르겠다. 버티고 버텼던 시간이 있어서, 이제는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게 있다면 도전해 보자 싶었는데, 0부터 다시 시작하는 건 역시 어렵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편으론 설레기도 하다. 그전에 몰랐던 새로운 길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조금 있다.
8) 요즘 혼자만의 고뇌를 밖으로 하나씩 꺼내면서 알게 된 게 있다. 내가 가진 이 '명확하지 않음'이, 어쩌면 새로운 가능성이 될 수도 있다. 한 가지에 머무르지 않았기에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한 가지 모습에 갇히지 않았기에 더 다양한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전혀 의도한 적은 없지만, 내가 막연히 원하던 '넓은 세상'을 향해 이미 한 걸음을 내디뎠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9) 오늘도 아직 자기소개는 너무 어렵다. 설상가상으로 사진도 보통 찍어주는 사람이 된 적이 많다 보니, 내 사진은 몇 년 동안 한 장도 없었다. 그래서 사실 프로필 사진을 올려야 하는 것도 내겐 까다로운 일이다. 참 그 오랜 시간 동안 뭐가 그렇게 고민이 됐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언젠가 뒤돌아봤을 때, 이런 흔들림과 망설임들이 내 삶을 더 깊이 있고 단단하게 만들어줬다고 말할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