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노릇 좀 해라
나는 학창 시절 반에서 중간정도의 성적을 유지했다. 특별히 잘하는 분야도 없고 용모도 평범한 아니 냉정하게 말하면 좀 떨어지는 편이었다.
그런 내가 고등학교에서 선생님과 진로상담을 할 때 미래에 ‘기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내 말을 들은 선생님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데 ‘네가 어떻게?’라는 그 표정 말이다.
오기로라도 공부를 죽어라 할법한데 나는 오기도 없었나 보다. 공부는 평행선을 달렸고 나는 그 원인을 어려서부터 나를 괴롭혀온 ‘축농증'에 돌리기로 했다.
서로 사이가 좋지 않던 부모님은 내게 관심을 가질 시간이 없었는지 늘 두통에 시달렸던 나를 치료해주지 않았다.
결국 다 자라서 아르바이트로 번돈으로 나 스스로 병원을 찾아 수술을 받았다. 그 당시에 축농증 수술은 좀 잔인하게 느껴졌는데 의자에 몸을 고정시켜 놓고 얼굴부위에 마취를 한 후 드릴 같은 걸로 얼굴 턱 부분에 구멍을 내고 관을 넣어 고름을 빼내는 방식이었다.
수술 시에도 힘들었지만 이제 다 나으리라는 기대는 몇 달 후에 다시 재발하며 무너졌다.
이런 상황에 나는 아버지의 명령으로 공무원시험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어릴 적 ‘기자'의 꿈은 진작에 포기했고 여러 알바를 전전하던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아버지는 학원비를 대 줄 테니 공무원 학원에 다니라고 명했다.
‘사람노릇 좀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공부에 재능이 없었고 괜스레 돈만 낭비될 거 같았지만 일단 아버지말에 복종했다. 재발은 했지만 축농증은 전보다 증상이 약해졌고 가끔 정신이 맑아질 때도 있었기에 미미한 가능성을 기대했다.
학원생은 많았다. ‘이 사람들이 전부 다 공무원이 되려고 하는구나’를 생각하니 높은 경쟁률이 눈앞을 동동 떠다녔다. 그리고 앞으로 여러 달을 같이 공부하게 될 사람들은 나이도 경력도 모두 천차만별이었다.
사회성이 덜 발달한 나는 사람들과 친해질 자신이 없었지만 곧 적응이 되었다. 공동의 목표를 가졌다는 동지애 때문인지 그들은 경쟁보다는 서로 협력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그런 점이 문제가 되었다. 사이가 좋아지다 보니 밥을 같이 먹게 되고 얘기가 길어지고 심지어 학원이 끝나는 시간에 저녁까지 같이 하게 되면서 나에게는 큰 타격이 되었다. 공부에 약자인 나는 남들보다 더 노력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되었다.
하지만 집에 가면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학교 때도 관심 없던 부모님 특히 아버지는 ‘학원비가 아까워서 저러나' 싶을 정도로 관심을 보였다. 아버지의 날카로운 눈과 목소리는 나를 공부하게 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그리고 학원생들은 영리하게 시간을 배분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공부하고 있었다. 점점 시험일이 다가오자 긴장은 최고조로 달했고 대화는 작은 소곤거림으로 바뀌었다.
그 긴장감이 부담스러워 나는 시험일 보름 전부터 학원을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혼자 공부해 보겠다고 도서관에 다녔는데 집중이 되기는커녕 조용한 분위기에 자꾸 잠이 쏟아졌다.
커피를 물 마시듯 마시며 나름 공부했지만 막상 시험장에서 나는 자신이 없었다. 학교 때처럼 3번일까? 4번일까? 를 번뇌하는 문제가 수두룩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시험이 끝났는데 전혀 홀가분하지가 않았다. 그렇게 자신 없는 시험에 합격을 했다. 물론 점수는 낮았고 간신히 턱걸이했다는 걸 알았지만 아버지가 원했던 사람노릇을 할 수 있게 되어 기분은 좋았다.
면접을 치르고 이제 발령을 기다리면 되었다. 시험점수를 기준으로 발령순서가 정해지니 나는 몇 개월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음은 가벼웠고 나는 친구가 다니는 빵집 아르바이트를 따라다니며 미래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