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적인 만남

강렬하고 짧은

by 바쁜 거북이

어느 날 자취방 주인아주머니가 나에게 말했다.

“내일 저녁에 건넌방에 방 구경하려는 사람이 올 거예요 저녁 늦게 온다고 했으니까 두드리면 문 좀 열어줘요"


그날 밤 나는 이상하고 무서운 꿈을 꾸었다. 동화책에나 나올법한 코가 긴 노파가 구불구불한 지팡이를 들고 내 앞에 서있었다.


뭐라고 중얼거리나 싶더니 바로 앞에 있던 작은 지렁이 같은 걸 지팡이로 툭 치는 것이었다. 그러자 작은 지렁이는 순식간에 커다란 용으로 변했다.


그리고 놀란 것도 잠시 나는 용의 등에 올라 있었다. 내 앞쪽으로 두 명의 여자가 앉아 있었고 우리는 모두 겁에 질려 있었다.


갑자기 용이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나는 잡아 먹히는 줄 알고 소리를 질렀다.


"도망가"


그리고 잠에서 깼다. 나는 여전히 생생한 꿈에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주변에서는 내 꿈얘기를 듣더니 태몽이라고 했다. 결혼도 안 한 사람한테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했더니 그럼 남의 태몽을 대신 꾼 걸 수도 있다고 했다.


복권을 사려고 하다가 사지 못했고 그날 밤에 누가 온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일찌감치 맥주를 세 캔정도 마시고 빵으로 입가심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무시하려다가 문득 아주머니 말이 생각나서 문을 열었더니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근처 건설 현장에 파견 나온 소장으로 두 달 정도 머물 것이라고 했다.


바깥날씨가 추웠는데 그는 현장용 펭귄작업복을 입고 있었고 멍하니 서있는 내게 “좀 들어가도 될까요? 추운데..”라고 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아 네 구경하세요"라고 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잠옷으로 입고 있던 빨간 내복 차림인 것을 말이다. 나는 내방으로 도망쳤고 그가 방을 제대로 찾아 구경을 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다음날 아침 바깥은 밤새 내린 눈이 쌓여있었다. 나는 치러야 할 출근전쟁 생각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온몸을 꽁꽁 싸맨 후 불편한 구두에 발을 넣고 길을 나섰다. 내 방은 2층으로 계단을 내려와야 하는데 계단이 외부에 노출되어 있어 눈이 오면 그대로 쌓여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누가 계단을 청소했는지 계단에 눈이 없었다.


나는 계단 끝에서 집앞쪽을 부지런히 쓸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는데 그는 어제 보았던 ‘펭귄맨'이었다.


그는 나를 보자 “안녕하세요? 출근하세요? 눈길 조심하세요"라고 했다. 좋은 목소리였다. 이상하게 기분을 좋게 하는 사람이다.


“네" 나는 짧게 대답했다. 더 말하고 싶었는데 출근시간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그날 저녁 퇴근도 8시가 훨씬 넘은 시간이었고 공동으로 사용하는 거실문을 여는 순간 치킨 냄새가 났다.


거실 한가운데 그와 자취생 3명이 둘러앉아 있었다. 자취생들은 나를 누나라고 부르는 대학생들이다. 항상 바쁜 아이들이었는데 어쩐 일인지 다 모여있었다.


알고 보니 그가 나름 신고식을 하는 중이었고 치킨 옆에는 생맥주도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안주로 빵대신 치킨을 먹을 수 있었다.


그는 좌중을 압도하는 언변을 가지고 있었고 친화력도 좋아 보였다. 이렇게 시작된 우리들의 술파티는 거의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이루어졌다.


어떤 날은 대학생 동생들이 다른 모임에 가면 우리 둘이 먹는 날도 많았다. 그렇게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하던 중에 그가 들어온 지 두 달이 지났다.


그는 별 다른 인사말도 없이 방을 나갔다. 그 이후로 마음이 허전했다. 동생들은 물주가 사라지자 더 이상 모이려고 하지 않았고 나는 또 혼술을 해야 했다.


생각해 보니 그가 들어온 후 항상 우울한 직장생활이 조금 즐거워진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의 연락을 기다렸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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