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결정
오랜만에 집에 온 남편에게 말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수원으로 가겠다고 말이다. 왜 그러냐고 묻기에 화가 났다.
다 말해야 아느냐고!!
나는 8급 승진 8년 만에 7급으로 승진했다. 승진이 꼭 실력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지만 나는 입사동기보다 많이 늦은 편이었다.
그러고 보니 승진에 신경 쓴 적이 없었다. 공무원이니 시간 지나면 저절로 되겠거니 안심했었고 ‘열심히 하면 알아서 보상을 주겠지' 하는 안이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승진을 하고 나니 퇴직이 하고 싶어졌다. 둘째 아이는 초등학교 4학년이 되어도 숫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고 점차 또래와 다른 점이 많이 보였다.
아이에게 온 신경을 쏟아부어도 시원치 않을 것 같은데 주위에서는 모두 내게 버티라고 했다. 어차피 그만둔다고 뾰족한 수는 없다고 했다.
결국 나는 퇴직하지 못했고 수원으로 발령이 났다. 7급 승진 후 한 번은 거쳐야 하는 발령인데 그나마 가까운 곳이 수원이었다.
처음엔 평택에서 수원으로 출퇴근을 했는데 점차 힘에 겨웠다. 내 상사는 출퇴근 시간에 예민한 사람으로 아랫직원들은 본인보다 더 빠르게 출근해야 하고 늦게 퇴근하길 바라는 사람이었다.
거기에 7급 승진을 하고 나니 나와 같은 7급 직원들의 행동이 눈에 들어왔다. 남녀가 비슷한 비율로 여직원 중 아이엄마도 많았는데 눈치도 빠르고 업무능력도 좋아 보였다.
퇴직하지 못하니 이 전쟁 중에 살아남아야 함을 느끼게 되었고 아이를 핑계로 ‘정시에 퇴근겠습니다'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업무량과 회식이 많아지자 퇴근은 점점 늦어지고 퇴근 후 집에 가면 아이들은 거의 자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생활이 지속되던 중에 직장에서 운영하는 관사 중에 빈 곳이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관사는 신청한 직원 중에 추첨을 통해 들어갈 수 있는데 저렴한 보증금과 월 이용료로 꽤 인기가 있었다. 물론 건물은 오래되어 낡았고 기름보일러는 효율이 좋지 않아 겨울에 난방비가 많이 들어간다는 단점이 있지만 나는 수원으로 오라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담당직원에게 물어보니 다행히 다른 신청자가 없다고 한다.
수원으로 가겠다는 내 얘기에 남편은 반대하지 못했다. 약간 놀란 것 같았지만 논리적이지 못한 내 말에도 진심은 느꼈는지 함께 어머니께 허락을 구했다.
아니면 그간 자신의 무심함에 대한 나의 반란이라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나의 돌발행동에 놀라셨는지 말투에 분노감마저 느껴졌는데 그래도 이사할 때는 당장 필요한 그릇등을 챙겨주셨다.
이렇게 나와 아이들의 수원생활이 시작되었다.
나에게 수원은 마치 제2의 고향 같은 곳이 되었다. 큰 아이는 중학교 1학년을 수원에서 시작했고 작은 아이는 초등학교 4학년을 시작했다.
주소를 이전하고 학교를 옮기고 허름한 관사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미안한 마음이 있었지만 나는 아이들과 좀 더 가까워지는 걸 느꼈다.
아이들이 다닐 학원을 알아보느라 분주한데 아들의 담임선생님이 전화를 했다.
“어머님 아이를 관찰하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어요 어머님은 못 느끼셨나요?”
“아 네 아이가 숫자를 잘 모르고 말귀도 잘 못 알아듣긴 해요"
“제 말은 그게 아니고 아이가 발달장애가 아닐까 해서요"
선생님은 답답하다는 듯이 속사포로 말을 이어갔다. 이전에도 이런 아이를 보았는데 부모에게 알려 병원에 데려갔더니 발달장애로 판명이 났다는 것이다.
처음 “발달장애"란 말을 들었을 때 생소했다. 그리고 설마 하는 생각과 함께 자괴감까지 들었다.
다음날 바로 아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향했다. 제발 아니길 바라면서.
원장과의 면담 후 정밀진단을 위해 부모와 가족관계등 몇백 개의 문항이 적힌 질문지가 주어졌고 남편과 나 그리고 큰아이까지 질문지를 다 작성 후 제출했다.
아이는 검사실로 들어가 4시간 정도의 검사 후에 나왔다. 며칠 후 나온 검사결과는 ‘중증지적장애'였다.
치료가 되냐는 물음에 의사는 최선을 다해보자는 말로 답했다. 치료센터가 바로 옆건물에 있었고 과목당 50분에 5만 원의 비용이 드는 미술치료와 언어치료 두 가지를 시작했고 한 달에 한번 의사와의 면담을 진행했다.
일주일에 세 번씩 조퇴 후 아이를 데리고 치료과정을 다녔다. 6개월 정도 그런 생활이 이어졌고 아이는 처음에는 좀 나아지는 것처럼 보이다가 어느 순간 멈추는 현상이 생겼다.
이제 의사는 내게 장애인등록을 권유했고 나는 가족회의를 소집했다. 회의 참석자는 남편과 큰딸, 어쩌면 답은 이미 나와있었다. 우리 모두 아이가 나아질 수 없음을 느끼고 있었고 몇 마디의 대화 끝에 결정권은 내게 주어졌다.
자식이지만 한 사람의 인생에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 나는 마음이 무거웠다. 나는 두 달 정도 고민을 하다 결국 장애인등록을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