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무가 아니야

움직이는 사람이야

by 바쁜 거북이

아들은 치료를 받아도 효과가 별로 없었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누군가 내게 가정 방문하는 선생님도 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알아보니 국가 보조금이 있는지 이전보다 저렴하게 그것도 집으로 선생님이 올 수 있다니 내 부담이 훨씬 덜해졌다.


여선생님은 인상이 날카로웠지만 일주일에 두 번 오는 수업 준비는 꼼꼼하게 잘하는 것 같았다. 선생님이 오는 시간을 내가 퇴근하는 저녁 시간에 맞추었고 간식에도 신경을 썼다.


1년여간 계속 수업이 진행되던 어느 날 아들이 이상한 소리를 했다. 선생님이 묻는 말에 답을 못하니까 때리더라는 것이다. 처음 듣는 말에 당황스러웠고 자세히 물어보니 아이는 대답을 회피하며 선생님이 무섭다는 말을 반복했다.


아들의 말을 그대로 믿는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선생님이 속한 단체에 연락을 해서 사정이 생겨 더 이상 수업받기 힘들다는 말을 전했다.


나는 아들을 위한 다른 교육 방법을 고민해야 했고 많아지는 업무량과 함께 모든 상황이 나를 옥죄는 느낌이 들었다.


직장에서 내 상황을 알아도 더 이상 민폐를 끼칠 수 없다는 생각과 실제로 따갑게 느껴지는 상사의 시선은 어쩔 수가 없었다.


공무원이지만 사업 부서에서 일하는 나는 다음 해 실적 증대를 위한 보고서를 써야 했던 날 쓰러졌다.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에 병원에 실려간 나의 병명은 ‘정맥류 파열'이었다.


일명 ‘뇌출혈'로 의사가 다행이라고 여긴 점은 ‘동맥류 파열'이 아니라서였다. 다행히 약물 치료로 머리가 정상화되었지만 6개월간 질병 휴직을 내야 했다.


남편은 많이 놀랐는지 회사에 휴가를 내고 병간호와 퇴원 후 며칠간 살림을 돌봐 주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처음 돌봄을 받는 듯한 편안함도 잠시 열흘 정도 지나자 “이제 좀 쉬엄쉬엄 해"라는 말을 남기고 그는 회사로 돌아갔다.


4개월 정도는 거의 멍하니 있었던 것 같다. 주기적으로 병원을 방문하고 약을 복용하면 멍해지니 별 다른 활동을 할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아이들은 내가 집에 있으니 좋은 모양이었다. 아이들의 표정을 보니 또다시 번뇌가 찾아왔다.


‘이대로 그만두면 좋겠다’


그러나 나의 직장생활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부터 2년에 한 번씩 새로운 병이 찾아왔다.



큰딸은 대학을 졸업했고 아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 오전에 활동보조 선생님과 장애인 복지관에서 몇 가지 수업을 듣고 오후에 커피숍으로 일하러 다닌다.


활동보조 선생님은 추천을 받거나 내가 직접 선생님을 찾아다녀야 하는데 나는 몇 번의 실패한 선택을 거쳐 지금의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선생님은 연륜과 사랑으로 아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느껴져 안심이 되었고 덕분에 나는 몇 번의 퇴직 유혹을 견디고 버텨왔다.


7급 승진 후 12년 만에 6급이 되었다. 내 나이는 50이 되었고 직장에서 제법 터줏대감 노릇을 하기도 했다. 나이에 비해 늦은 진급이었고 더 이상의 진전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서툴고 누군가를 위한다는 마음만으로는 별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도 알았다. 나는 그저 부서지기 쉬운 조직의 작은 돌멩이였다.


6년을 더 근무하면서 정년까지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몸과 마음은 이미 피폐해져 있었고 나는 며칠의 고민 끝에 명예퇴직을 선택했다.


공무원은 일정기간 이상 근무 후 요건이 되면 명예퇴직을 신청할 수 있는데 나는 진작에 요건은 되었지만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너무 오래 한 자리에 뿌리내린 나무 같았고 풍성하게 열매 맺지 못한 나무는 땅 속에 뿌리만 무성했다


결국 8급부터 생각해 온 퇴직을 긴 시간의 터널을 지나 6급으로 마무리했다. 그간 나는 마음속 목소리를 내지 못했고 그 때문에 더 힘든 길을 걸어왔지만 그래도 현명한 판단이 많았다고 위로해 본다.


처음 퇴직 했을 때 그간 나의 행보에 대한 후회와 직장에 대한 원망이 많았다. 그 원망은 직장 근처에 가지 못 할 정도로 깊었지만 세월이 흐르니 원망이 지나가고 용기를 주었던 일부 동료들과 이제는 돌아가신 아버지께도 감사 한 마음이 든다.


“아버지는 내가 공무원에 합격했을 때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아마 아버지와 계속 지냈으면 나는 아버지의 채찍과 격려에 지금 보다 높은 위치에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만큼 더 힘들지 않았을까?”


나는 약해진 건강을 추스르고 항상 시간에 쫓겨 빠르게 말하고 빠르게 식사하던 버릇을 서서히 고쳐 가고 있다.


성장해서 나의 친구가 된 딸과 아직 정신적으로 어린 아들이 이런 나를 전 과는 다른 시선으로 보는 것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