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삶
결혼식장에 온 동료와 상사들은 모두 따뜻한 얼굴이었는데 일주일의 신혼여행을 다녀왔더니 그들은 다시 예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남편의 새 직장은 남편을 멀리 출장 보냈다. 한 달에 한번 정도 집에 올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시어머니와 둘이 지내야 했다.
결혼 전 남편은 나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아이를 낳으면 봐줄 사람이 필요하니 어머니와 함께 살자’
나는 이 제안에 처음엔 망설였지만 받아들였다.
남편의 꿍꿍이가 어쨌든 간에 나의 단순한 생각은 내 쓸쓸한 어린 시절보다 아이에게는 다복한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소망과 내 부모님과 못다 한 소통을 시어머니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었다.
어머니는 냉정한 첫인상과 달리 자잘한 일은 그냥 넘어가 주셔서 마음이 편했다. 처음엔 정말 엄마가 다시 생긴 것만 같았다. 그런데 너무 편하게 생각했던 걸까?
결혼 후 1년 반 만에 첫아이가 생겼고 남편을 닮아 눈이 커다란 예쁜 딸아이가 태어났다. 두 달의 출산휴가를 받아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아기를 돌보는데 아기를 돌보는 일은 출근하는 것보다 몇 배는 힘든 일이었다.
거기에 나와 비슷한 시기에 출산을 한 막내 시누이도 집으로 오게 되었다. 지금이야 산후조리원이 많지만 그 당시엔 들어갈 생각도 하지 못하던 시기였다. 나는 점차 어머님과 시누이의 눈치를 보며 생활하게 되었다.
이런 시기에 남편이라도 옆에서 돌봐주면 좋으련만 남편은 여전히 한 달이나 두 달에 한 번씩 집에 왔다.
우리 부부의 주말부부 생활은 이때부터 몸에 밴 것 같다.
아이를 낳고 보니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났다. 여전히 무서운 아버지 말고 엄마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는 아버지와 헤어진 후 자유의 날개를 달고 아프리카 봉사활동을 다닌다고 했다. 나중에 아이를 보러 오긴 했지만 내가 정말 필요로 할 때 함께 하지 못하는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두 달의 출산휴가가 10일쯤 남았을 때 직장상사가 전화를 했다.
나는 결혼 전에 직장을 시댁 근처로 옮겨 달라는 ‘연고지 전보' 신청을 했다. 마침 평택 쪽에서 천안으로 오려는 직원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인사이동이 이루어졌다.
평택에서 직장을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아 출산휴가를 들어갔으니 동료직원과 특히 상사의 눈치가 보였지만 당당하게 들어갔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전화를 건 직장상사는 잘 지내냐고 묻고는 이제 슬슬 나와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한여름이라 비수기일 텐데 일이 많으니 좀 나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직 10일이 남아있었지만 나는 “네 내일부터 나갈게요"라고 대답했다. 눈치를 본 것이다.
아니면 이 힘든 육아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나는 출근하고 어머니가 아이를 돌봐주셨다. 나름 어머니의 노고를 덜어드리고 싶었지만 거북이는 바쁘기만 하고 제대로 하는 일이 없었다.
일도 살림도 육아도 모두 낙제하는 느낌이었다. 신경은 날카로워지고 어쩌다 아이가 아프면 어머님께 화가 났다.
시댁은 시내에서 도보로 30분은 걸어가야 하는 거리로 마을버스가 다니긴 했지만 거의 1시간에 한대만 운행했기 때문에 아이가 병원에 가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어머니는 내게 전화를 하셨다.
상사에게 외출이나 조퇴를 올리면서 또 눈치를 본다. 그렇게 얻은 시간으로 다시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다녀오면 나는 기진맥진 해진다.
이런 생활이 지속되는 가운데 큰아이가 3살 때 둘째 아이가 태어났다. 둘째를 출산할 때 남편이 옆에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 축하한다며 찾아온 친구와 함께 나가더니 만취가 되어 돌아왔다.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뜬금없이 눈물이 흐르고 자주 슬픈 감정에 휩싸였다. 남편은 가끔 내 눈물을 볼 때면 위로를 해주지만 별로 위로가 되지 않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둘째 아이는 느려도 많이 느렸다.
남자아이라 좀 늦게 발달한다는 어머니 말씀을 나는 믿고 싶었다. 아니 더 이상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었다.
남편은 집에 오는 횟수가 늘어났지만 무심한 편이었고 나는 해야 하는 일을 책임감 있게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나처럼 거북이 스타일은 한 가지 일을 해내려면 다른 일은 내려놓아야 했음을 겁 많은 나는 인지하지 못했다.
그 사이 큰 아이는 과묵하고 혼자 일을 잘 처리하는 스타일로 성장해 있었고 작은 아이는 학교에 들어가야 하는데 한글과 숫자 중 특히 숫자를 깨우치지 못했다.
내가 가르칠 시간은 없었고 여기저기 학원을 보내보아도 도무지 진전이 없었다. 나는 점점 불안하고 우울해졌다. 괜스레 세 살 터울인 큰딸이 동생을 잘 돌보지 않는다는 생트집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