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킷리스트를 쓰는 활동을 할 거에요. 여러분이 꼭 하고 싶은 일, 이루고 싶은 소망, 꿈을 솔직하게 쓰면 됩니다.”
머뭇거리는 아이들이 많았다. 예시를 여러개 들어줬음에도 아이들은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이유를 물으니, 이런 꿈을 꾼다고 하면 “쟤 웃긴다, 지가 뭐라고? 지가 뭐라도 돼?”라고 할까봐 신경이 쓰인다고 했다. CEO가 꿈이라고 하면, “반장도 아닌데 네가 무슨”이라고 할 것 같고, 의사가 꿈이라고 하면, “넌 공부 잘 못하잖아”라고 할 것 같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아이들이 꿈꾸는 것에도 자유롭지 못할까?
꿈꾸는 데도 눈치를 보는 아이들 속에, 나의 모습이 보였다.
초임교사 때부터 긴 시간, 나는 남의 시선 가운데 갇혀 있었다. 내가 원하는 바대로 하지 못했다. 작은 문제라도 생기면 스스로 해결하거나 아이들에게 묻기보다 연구실로 달려갔다. 인디스쿨에 자료를 나누고자 할 때도, 내게 자격이 있는가를 물었다. 남을 돕는 일에도 남의 눈치를 살피고 망설였다. 나의 욕구보다 갈등 없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했다. 꼭 인정을 얻기 위해서는 아니었지만 비난만은 피하고 싶었다.
내가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그래서 끊임없이 아이를 단속하고 관리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하기보다 관행에 따르도록 했다. 생각을 묻기보다 순응을 가르쳤다. 집단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아이들을 통제했다. 그 결과 아이들은 혼나지 않게 자신을 감췄다. 사소한 일에도 허락을 받았고, 시키는 대로 했고, 나중에는 시키는 것만 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책임감이 강하고 착실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모나지 않게 교직생활을 수 있었다. 하지만 교실에 내가 없었고 아이들도 없었다.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 다른 반에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건 사회적 요구지, 나의 바람이 아니었다.
타인으로부터의 평가, 집단에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은 주어지는 결과일 뿐 내가 꿈꾸는 교실이 아니었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웃을 수 있는 행복한 교실을 만들고 싶다. 아이들에게 자신의 소중함과 자기다움을 일깨우고 싶다. 자신을 좋아할 수 있는 경험을 만들어주고 싶다. 남의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생각과 이야기를 할 수 있길 바란다. 있는 모습 그대로 자신을 받아들이고, 개성과 창의성, 상상력을 마음껏 펼쳐나갔으면 좋겠다.
보여 지는 모습이 아닌 아이들과 교사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묻고 어떤 교실을 만들고 싶은가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남의 시선이라는 그늘에 가려 있으면, 어떠한 노력도 열정도 빛날 수 없다.씨를 뿌리지 않으면 아무리 물을 주고 가꾸어도, 결실을 맺을 수 없다.
아이의 자율성을 키우기 위해 먼저 만나야 할 사람은 바로 부모 그리고 교사 자신이다.
자기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일 때, 아이들을 감싸 안고 자율성을 펼치도록 격려해줄 수 있다.
자율은 감추어진 자기 자신과의 만남이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스스로와 화목하게 지내는 연습이며 과정이다. 나와 화목해야 다른 사람과도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 먼저 나를 좋아해야, 남도 사랑할 수 있다.
교실은 더불어 살아가는 법과 함께 나로 살아갈 방법을 배우는 곳이다. 집단의 결속만큼 개인의 취향과 감정을 소중히 여길 때 아이들의 자율성은 자란다. 집단의 안정성을 지키면서도 개개인의 자율성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교실 속에서 자기다움을 깨달아갈 수 있기를, 자신을 그리고 서로를 더 좋아할 수 있기를, 그 과정에서 함께 성장해 나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