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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뚝이샘 Oct 25. 2020

나다운 수업을 하는 데 10년이 걸렸다

공개수업 날이면 늘 청소를 했다

 누군가에게 수업을 보여준다는 것은 내게 큰 부담이었다. 공개수업 날이면 늘 청소를 했다. 줄을 맞추고 책상 서랍을 깨끗이 정리했다. 평소에는 열어두던 책가방 지퍼도 닫게 했고, 학습 문제를 정자체로 또박또박 썼다. 먼지 하나 없이 말끔한 교실에서 공개수업은 실수 투성이었다. 시간 계획을 잘 못해 활동 중에 수업 종이 친 날도 있고, 긴장한 나머지 아이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파란 잠바 입은 학생”으로 지목한 적도 있다. 그러다보니 수업 협의회에서 소감은 자기반성 내지 자아비판이 되곤 했다.

 신규교사 시절, 초임교사 때는 그래도 괜찮았다. 처음은 누구나 미숙하니까. 그런데 경력이 쌓일수록 그조차 힘들었다. 

 공개수업을 못했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공개수업이 임용고시처럼 점수화 되어 당락에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고, 설령 망쳤다 하더라도 어떤 불이익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잘한다 한들 어떤 유익과 혜택도 없다. 그런데 왜, 나는 참관하는 선생님을 의식하고 마음에 들려고 애를 쓰는 걸까? 공개수업 날, 교장선생님의 갑작스러운 출장 소식은 왜 그렇게 반가운걸까?     


 공개수업을 망치고, 협의회에서 자아비판을 수차례 반복하고서, 나는 그냥 평소대로, 하던 대로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기껏 준비해서 하는 공개 수업이 평소 수업보다 훨씬 못하니 말이다. 9년차 무렵의 동료교사 공개수업이 시작이었다. 공개수업을 위해 따로 시간표나 과목을 바꾸지 않았다. 정해진 날짜의 과목과 차시 그대로 했다. 공개수업 당일 대청소 대신, 보이는 휴지만 주웠다. 서랍 정리도 안하고, 책가방 지퍼 닫기도 안했다. 부담감을 이기고,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준 그 수업은 내가 그동안 했던 어떤 공개수업보다 만족스러웠다. 아이들이 평소보다 잘한 것도 아니었고, 참관하신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것도 아니다. 그저 나 스스로를 향한 만족이 있었다.

 그때는 왜 만족스러웠는지 분명한 이유를 찾지 못했는데, 이제는 알 것 같다. 수업에 대한 틀을 깨고 나온 것이 기쁘고 만족스러웠던 것이다.


 인정받아야 한다는 틀, 잘해야 한다는 틀을 깨고 나서야 비로소 나다운 수업을 할 수 있었다. 자연스러운 수업을 하기까지 10년 가까이 걸렸다. 내가 가진 틀을 깨고 나서야, 아이들의 틀이 보였고, 틀을 깨고 울타리를 세우는 안내자가 될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수업은 ‘흑백의 교육과정에 컬러를 덧입혀 생동감을 주는 일’이다. 교육과정에 교사와 아이들의 색깔이 입혀져 생명력을 불어넣는 하나의 예술이다. 수업에는 교사와 아이들이라는 ‘사람’이 들어가며, 그 존재의 ‘고유성’과 ‘정체성’이 나타난다. 그렇기에 수업은 본질적으로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잘한 수업과 못한 수업을 판단할 수 없다. 고유성과 정체성을 평가할 기준이란 없기 때문이다. 수업에 대한 평가의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워도 되는 이유다. 누구에게 잘 보이지 않아도 괜찮고, 잘하지 않아도 괜찮다. 가장 선생님다운 수업이 가장 전문적인 수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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