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향인인 내가 사람 만나는 게 피곤했던 진짜 이유

by 오뚝이샘

어제 좋아하는 지인 부부를 우리 집에 초대했다.

아들 덕에 알게 되었고, 그렇게 자주 얼굴을 보며 몇해를 보내다 보니 자연스레 마음이 가까워진 사이.

없는 솜씨에 이것저것 만들어 식탁에 올렸다.

잘 드셔주시는 것도 고마웠지만,

같은 공간에 앉아 같은 음식을 나누는 그 시간이 그냥 좋았다.

정말 좋은 분들이다.

비교하지 않고, 사람을 재지 않고, 누군가를 만나도 굳이 줄 세우지 않는다.

예의를 지키는 걸 넘어서, 그냥 사람이 편하다.

그래서 나도 그렇게 편하게 대할 수 있었다.

이만큼 했으니 저만큼 돌아와야 한다는 마음도 없고,

그저 같이 앉아 웃고 먹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나는 내향인이다.

사람 많은 자리에 가면 기가 빨리고, 회식은 늘 일의 연장이었다.

1차 식사까지는 괜찮아도 2차 노래방 얘기가 나오면 조용히 빠져나왔다.

다음 날 출근을 못할 걸 아니까.

그래서 오랫동안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사람이 피곤한 사람인가 보다.

그런데 어젯밤, 손님이 가고 난 뒤 남은 피곤함은 마음이 닳아서 생긴 피곤함이 아니었다.

좋은 시간을 보내고 난 뒤의 피곤함이었다.

에너지는 썼지만, 마음은 채워져 있었다.

그러고보면 내가 피곤했던 건 사람이 아니었던 거 같다.

기능과 평가가 전제된 관계였다.

업무처럼 역할을 다해야 하고

잘해야 하고,

실수하면 평가받고,

저쪽에서 이만큼 하면 나도 그 이상 돌려주어야 하는 관계.

그 긴장감이 나를 지치게 했던 거다.

어젯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됐다.

잘 보일 필요도, 계산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서로가 서로에게 그냥 존재로 있었던 거 같다.

육아도 비슷하다.

아이의 존재만 바라보면 그저 기쁘다.

세상에 와줘서 고맙고, 자고 있는 얼굴만 봐도 마음이 물렁해진다.

그런데 육아가 힘든 이유는 아이 자체가 아닌 것 같다.

공부를 안 하고,

숙제를 미루고,

말을 안 듣는 상황 때문이다.

그 순간 나는 아이를 존재로 보는 게 아니라 역할로 보기 시작한다.

“엄마가 이만큼 하는데.”

“엄마가 너를 위해 얼마나 애쓰는데.”

이 말 속에는 계산이 있다.

내가 준 만큼, 너도 해야 한다는 기능적 계약.

그 관계에서 기쁨은 아이가 기대에 부응할 때만 생긴다.

그리고 곧 다음 기대가 쌓인다.

끝이 없다.

어젯밤 나는 기능이 아니라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긴장이 풀렸다.

그래서 마음이 열렸다.

아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엄마가 자신을 성과로 보는지, 존재로 보는지 아이는 안다.

그냥 존재로 만나주는 엄마 앞에 아이는 기댄다.

기능으로 만나는 엄마 앞에서 아이는 긴장한다.

우리를 지치게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기능과 평가가 전제된 관계다.

어른의 인간관계든,

육아든.

우리가 진짜 목말라하는 것은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쓸모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나이기 때문에

괜찮다고 말해주는

단 한 사람이다.

아이에게 그 한 사람이 되어주는 연습이

우리가 매일 하는 사랑의 진짜 일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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