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usmi & Mariage : Earl Grey
이야기로 쓰는 티타임 4.
Kusmi Tea : Earl Grey & Mariage Freres : Earl Grey Imperial
차고 시린 겨울이었다. 검푸른 회색빛 하늘 사이로 빗방울들이 가느다란 선을 긋고 있었다.
보통 이런 날씨엔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한 굳이 밖을 나서는 일이 잘 없었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그냥 이리저리 걸어보고 싶었다. 낯선 마을에 도착한 지 단 하루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날씨 때문에 방 안에만 머물러 있는 건 너무 손해 보는 기분이었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아무 무늬 없는 검은 우산을 쓰고 골목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몇몇 소품이나 장식, 자동차 같은 요소를 빼면 시간이 그대로 멈춘 것처럼 옛 모습을 변함없이 간직하고 있는 마을의 광경을 천천히 뜯어보는 시간은 혼자여도 제법 재미있었다.
그러다 저기 모퉁이에 자리 잡은 어느 소품샵 하나가 눈에 띄었다. 마을과 관련된 이런저런 그림들이 가게 창문에 붙어 있는 걸 보니 어쩌면 뭔가 재미있는 걸 발견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무심코 스쳐 지나갔고, 나는 그대로 빗물이 사이사이 고인 울퉁불퉁한 돌바닥을 가로질러 상점으로 들어갔다.
넓은 탁자 위에 줄지어 놓인 소품들을 구경하다 어느 순간 가게 한편에 있는 엽서 꽂이에 시선이 머물렀다.
사진도 있었고 그림도 있었지만 모두 이곳 마을을 담은 엽서들이 한가득 진열된 회전형 스탠드를 천천히 돌리며 살펴보니 한눈에 보아도 퍽 오래되어 보이는 흑백 엽서들이 눈에 들어왔다. 단순히 오래된 이미지를 프린트해 둔 엽서가 아니라 정말 오래된 종이들이었다. 평소 이런 걸 구하고 싶었던 기억에 몇 장을 신중히 골라 계산한 후 집으로 돌아갔다.
여전히 창밖은 비 오는 하늘로 덮여 있었다. 나는 뜨거운 얼그레이가 한가득 든 머그잔과 함께 탁자 앞에 앉았다. 희고 얇은 종이 재질의 봉투에서 아까 구입했던 엽서들을 꺼내보는데 계산할 때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엽서가 한 장 더 들어 있었다. 언제 찍힌 사진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오래전의 마을 모습을 찍은 것이었다. 엽서들이 진열되어 있던 스탠드에서 분명 본 엽서였고, 심지어 이걸로 할까 고민까지 하다 결국 내려놓았는데 이렇게 내 손으로 들어올지는 몰랐다. 그냥 준 걸까? 가게 주인 할머니가 친절하기는 했는데...
엽서를 찬찬히 훑어보다 가방 속 필통을 뒤적여 연필과 색연필 몇 자루를 테이블 위에 꺼내놓았다.
갑자기 엽서에다 뭐든 해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엽서 이미지를 뒷면으로 돌려 종이 위에 가는 연필선을 그려보기 시작했다. 머그잔의 얼그레이에서 흘러나오는 새콤 상큼한 베르가못 향을 따라, 옅지만 길게 이어지는 잔향에 의지하며 선을 그어 나갔다. 그냥 아무 계획 없이 갑자기 하게 된 일인 만큼 문득 생각나는 걸 그리기로 했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 집의 주인이 언젠가 흘리듯 했던 이야기를 다시금 떠올리면서.
오래되어 색이 바랜 누군가의 기억이, 종이면에 맞닿은 연필의 심 끝을 통해 사각거리며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차분하게 나아가기 시작한 선은 잔잔함을 품고 종이를 가로질렀지만, 어느 부분을 지날 때는 조금 거칠게 튀어 오르기도 했다. 점점 형태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잠시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선을 이어나갔다.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알게 모르게 탁자 위를 은은하게 덮고 있을 베르가못 향을 생각하며 가늘고 희미한 선들을 종이에 마저 그려 넣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색연필로 바꿔 들어 연필선 사이사이를 옅고 진하게 채워 나갔다. 그렇게 아무것도 없던 흰 바탕에 작은 세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게 이 이야기를 해준 집주인이 아주 오래전 마을로 처음 이사 왔던 날이었다. 마을 구경을 할 겸 길을 걷다가 우연히 마을의 후문 바로 건너편에 제법 넓은 베르가못 농장이 있는 걸 발견했다. 호기심에 살짝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농장으로 들어가려면 노란 벽으로 둘러싸인 아치형 문을 지나야 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사람은 이내 결심을 하고 조심스레 걸어 안쪽으로 들어섰다. 농장은 정말... 마치 전혀 다른 세상인 것처럼 눈앞에 펼쳐지는 자연은 생기가 넘쳤다. 심지어 누군가 만들어 놓은 세트장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이질감이 들었다. 하지만 왠지 기분은 좋았다. 그냥 좋은 것 이상으로, 생각지도 못한 녹색 풍경을 보자 마음이 즐겁고 상쾌해졌다.
녹색빛의 싱그러운 풀밭과 주황과 노랑 과실이 주렁주렁 열린 키 작은 나무들로 가득한 여기가, 꿈속에서 발견한 장소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신기하고도 놀라운 장면이었다. 아직 봄조차 시작되려면 꽤나 이른 계절이었지만 이곳만은 참 따뜻하고 선명한 빛깔로 다채로웠다.
믿기 힘든 이 광경을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고 싶어져서, 그 사람은 더욱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랜 시간 수레와 사람이 오가며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길을 따라 들어가자 점점 키가 자란 나무들이 곳곳에서 모습을 드려내었고, 베르가못이 주렁주렁 열리다 못해 늘어지는 나뭇가지를 도구를 빌려 한껏 지탱하는 나무들도 제법 많이 보였다. 하늘을 넓고 옅게 가린 구름이 바람을 타고 저 너머로 흘러가자, 밝은 빛줄기가 나뭇잎들 사이로 여기저기 길게 내려와 풀밭을 밝게 비추었다. 그런 풀밭을 가로질러 어느 나무 앞에 서 보았다. 한눈에 보아도 싱싱하고 탐스러운 빛깔을 한 베르가못 한 알이 그 사람의 눈높이에 꼭 맞는 위치에 매달려 있었다.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얼굴을 좀 더 가까이하니 밝은 주황이 시야에 한가득 들어옴과 동시에, 신선하고 향긋한 과실향이 느껴졌다.
툭툭, 그때 뭔가가 그 사람의 어깨를 건드렸다. 순간 놀라 뒤를 돌아보니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한 아이가 서 있었다. 이곳 마을 특유의 색감이 묻어나는 옷차림에, 한 손엔 나무를 흔들 때 쓰는 긴 막대기를 들고 있었고 당연히 그 막대기의 끝은 그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이는 차분하면서도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는 목소리로 그 사람이 누구이며, 어떤 이유로 들어와서 지금 뭘 하는 중인지 물었다. 앳된 얼굴과는 다르게 엄격한 표정과 단호한 말투를 한 걸로 보아 아마도 훗날 이 농장의 주인이 될 아이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진지한 태도로 하나씩 대답을 돌려주고서 마지막에는 이렇게 허락 없이 들어온 것에 대한 사과와 함께 자신이 마주한 농장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걸로 마무리했다.
하지만 대답을 모두 들은 아이는 무표정했다. 그 사람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했고, 이만 가보겠단 제스처를 취하며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채 몇 발자국 나아가지 못하고 이번엔 반대로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작은 손가락이 어깨를 툭툭 쳤기 때문에. 말없이 건네주는 걸 받아보니 아까 나무에 가까이 붙어 들여다보았던 바로 그 열매였다. 밝은 주황빛 베르가못 열매가 햇빛을 받아 황금보다 더 밝게 빛이 났다. 꼭 스스로 빛을 내는 것처럼.
그 사람은 처음 농장으로 들어왔을 때처럼 다시 노란 입구를 지나 밖으로 나왔지만 어쩐지 싱그러운 자연의 향이 가늘고 희미한 모습을 하고서 따라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날 저녁식사가 끝나고 언제나처럼 부엌 찬장에서 클래식한 홍차 티백을 하나 꺼내 뜨거운 머그잔에 넣을 때였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아까 받았던 베르가못 열매를 가지고 왔다. 비록 오일을 내지는 못해도 베르가못의 껍질 부분을 조금씩 얇게 썰어 머그에다 넣어 보았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찻물 속에서 은은하게 피어오른 향긋한 향이 차에다 썰어 넣고 남은 과실 향과 함께 집안 곳곳으로 가늘게 흘러 나아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낯선 집의 공간이 조금은 친근해 보이는 건 공기 중에 흐르는 향 때문일까. 방을 조금 둘러보다 조심스럽게 차를 한 모금을 마시자 이유 모를 기분 좋음에 그냥 웃음이 나왔다. 마을에 이사 온 첫날 받은 선물에는 이런 작은 따스함이 들어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했다. 지금 내가 맡고 있는 얼그레이의 향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이만 색연필을 내려놓았다. 노란 벽의 아치형 문과 그 너머의 베르가못 농장, 그리고 아이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갑자기 너무 궁금해졌다. 지금도 그렇게 아름다운 농장일까 궁금했고 아이는 시간이 흘러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아직 거기 있을지 궁금했다. 그래서 나도 한 번 찾아가 보기로 했다. 바로 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