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로 쓰는 티타임] 쿠스미의 그린 상트페테르부르크

Kusmi Tea: Green St Petersburg

by JiJi

이야기로 쓰는 티타임 3.




평소보다 학교가 일찍 끝난 금요일 오후였다.

푸른 하늘 아래 선명한 색채로 칠해진 거리를 따라 페테르는 뛰어가듯 신나게 걸어갔다.

오늘따라 일찍 공동현관에 다다른 기분을 느끼며 무거운 목재 대문을 열어젖히고,

어두운 복도를 지나 다시 문을 열고, 작은 화원 같은 안뜰을 가로질러 곧장 보이는 주택으로 쏙 들어갔다.

마치 달팽이 집 위를 걸어 나가듯 계단을 뱅글뱅글 돌아 올라 후다닥 5층까지 올라갔다. 드디어!

페테르는 현관문에 걸린 <집에 온 걸 환영해>라고 쓰인 장식에 잠깐 시선을 주고선 힘차게 열었다.


"나 왔어!"

아까 열쇠를 돌릴 때 이미 눈치를 챘는지 그새 쪼르르 달려와선 페테르의 발치에서 뒹굴고 있는 흰 솜뭉치를 들어 올렸다. 이제 막 잠에서 깼지만 아무도 집에 없어 휑하던 차에 페테르가 도착한 것이 분명했다.

방금 일어나 더 분홍스러운 코에 짧은 코인사를 해주니 고양이가 못 참고 버둥거렸다.

페테르는 그 모습에 깔깔거리고는 나무 바닥 위에 내려놓고 바로 부엌으로 향했다.

흰색 나무문 너머의 긴 일자형 부엌은 마치 또 다른 세상인 것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다.

긴 창문을 통해 세상으로부터 한 가득 들어온 햇빛이 공간을 따스한 노란빛으로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평화롭지만 적막하기도 한 부엌 특유의 분위기는 곧 순식간에 활기차게 변했다.


페테르는 먼저 책가방을 의자 위에 던져두고 싱크대에서 손을 빠르게 씻은 뒤에

아메리칸 토스트 빵과 크림치즈, 살구잼, 버터 스프레드, 슬라이스 치즈, 살라미를 차례대로 식탁 위에 툭툭 꺼내 놓았다. 이 정도면 점심으로 충분하고 충분했다. 어쩌면 많을지도..?

접시와 포크, 잼용 티스푼을 마저 꺼내고 빵은 토스트기에 넣었다. 이제 또 뭐가 필요할까? 생각하느라 잠깐 우두커니 서 있으니 다시금 적막감이 찾아왔다.

"아, 라디오!"

부엌에 작은 티비를 두는 대신 부모님은 라디오를 택했다. 부엌에서는 그냥 소리만 듣는 것도 좋다면서.

페테르는 요새 유행하는 음악을 소개해주는 채널을 들으며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토스트를 이제 반 정도 먹었을 때쯤, 이번엔 마실 것을 찾아 일어섰다.

냉장고 문을 열었지만 주스도 우유도 없이 달랑 물병뿐이었다.

그렇다고 물을 마시는 건 재미없잖아. 왠지 모를 서운한 마음을 느끼며 다시 자리로 돌아오는데, 갑자기 페테르의 시선이 찬장에 멈췄다.


<그린 상트 페테르부르크>

암녹색 배경에 불규칙적인 금색 라인이 섞여 있고 중앙에는 붉은 마크가 들어간 둥근 틴.

"상트 페테르부르크."

틴을 두 손으로 조심히 꺼내 마크 속 이름을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차의 이름이기도 했지만 외국의 어느 도시 이름이기도 했다. 그리고 페테르의 이름이기도.

페테르는 자신의 이름을 도시에서 따왔다는 걸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부모님이 어린 시절 나고 자란 그곳을 어쩔 수 없이 떠나오면서 마음속에 한 자락 숨겨온 낱말이었다.

어린 날의 모든 기억과 감정이 깃든 소중한 이름을, 그곳을 전혀 알지 못하는 페테르에게 전해주었다.

그래서일까 녹색 틴에 쓰인 차의 이름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자신의 이름을 보듯 친근했고, 왠지 자신을 위한 차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페테르는 전에 없던 새로운 경험을 해보기로 했다.


전기포트의 물이 거의 다 끓어가는 소리를 뒤로한 채

천천히 은색 철제 뚜껑을 열자 가장 먼저 존재감을 드러내는 건 향기였다.

풋풋한 풀내와 함께 새콤하면서도 달콤하고 부드러운, 복합적인 향기.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뒤섞여 있는 향신료 냄새도.

향신료 향을 따라 가늘게 이어지는 끝자락의 달콤한 여운은

마치 어느 날의 부엌에서 맡았던 진득하게 늘어지는 카라멜 냄새 같았다.

미묘한 향이 한바탕 코 끝을 휩쓸고 지나가니 그제야 내용물이 눈에 들어왔다.

뭐랄까... 향기에 비해 생각보다 좀 심심한 느낌?

그냥 좀 제각각 말려있는 녹색잎들?

아마 녹차일 거야. 페테르는 둥근 틴에 적힌 글씨를 돌려보며 생각했다.


평소 차를 마실 일이 잘 없었던 페테르는 이런 자신의 행동이 영 낯설었지만

이왕 마셔보기로 했으니 매일같이 보았던 소소한 순간을 되살려 최대한 따라 해 보기로 했다.

맞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찬장에서 도자기 티 필터가 들어있는 유리 머그를 꺼낸 뒤

티스푼을 이용해서 조심스럽게 찻잎을 덜어 넣고, 마지막으로 끓인 물을 붓고 기다렸다.

얼마나 우려야 할지 모르니 그냥 눈대중으로 적당한 때를 보면서.

머그를 도대체 얼마나 뚫어지게 쳐다보았을까,

어느덧 물의 색이 적당히 진해진 것 같아 천천히 도자기 필터를 들어내 보았다.

투명한 유리 너머로 펼쳐지는 노란빛이란!

페테르는 자신도 모르게 유리컵을 시선보다 조금 높이 들고서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넘실넘실 거리는 노랑 물빛 사이로 아주 미세한 조각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물 밑까지 푹 내려앉았다가 점프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부엌으로 들어오는 밝은 빛이 페테르가 들고 있는 유리컵에도 머물렀고, 투명한 노란빛은 더더욱 밝게 빛이 났다.

문득 그 모습이 햇빛을 끌어모아 가득 채워 놓은 액체 같다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을 잘 마시지 못하는 페테르는 잠시 유리 머그를 도로 내려놓았고 아까 먹다 반 정도 남은 토스트를 마저 먹기 시작했다. 이후 부엌 한구석에서 흘러나오는 신나는 노래에 맞춰 후다닥 먹고 치우기까지 금방이었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마셔볼 시간이 다가왔다.

페테르는 조금은 경건한 마음으로 다시 식탁 앞에 앉아, 따뜻한 온기를 머금은 머그를 양 손에 쥐고 홀짝거렸다.

혀를 델만큼 뜨겁지 않다는 걸 확인하고서 이번엔 좀 더 크게 한 모금을 마셔보았다.

부모님이 차를 마시는 걸 매번 지켜보기만 했지, 이렇게 직접 차를 잘 마셔보지 않은 페테르로서는 이 맛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지 알 길이 없었다. 여태 마셔본 적 없는 신기한 음료를 몰래 마신 기분이었다.

따뜻한 물이 입안으로 들어오기 직전까지는 왠지 달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혀로 느껴지는 맛은 씁쓸하고 좀 새콤한데 이름 모를 향신료 같은 향이 맴도는, 그런 오묘한 맛이었다.

맛있다고 하기도, 맛이 없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물이었다.

지금 이 기분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면 아마 물음표가 머리 위로 다섯 개는 떠다닐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자신도 모르게 킥킥 웃고만 페테르는 이 어려운 음료를 그만 옆으로 밀어 두고 그대로 식탁에 엎드려 나른한 머리를 뉘이고 라디오 음악에 귀 기울였다. 요새 유행하는 음악 세 곡이 순식간에 연이어 지나가고 광고로 이어질 때쯤 페테르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꺼풀이 점점 내려앉기 시작했고, 발랄하고 소란스러운 젤리 광고 소리가 페테르의 귓가를 떠나 점차 옅어져 갔다.


눈 앞에 보이는 건 오직 한 사람만이 걸을 수 있는 좁은 길이었다.

그 외에도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는 광경이었지만 여긴 꿈 속이었고 그런 건 별로 상관없었다.

새하얗고 부드러운 눈이 내려앉은 길은 깨끗했지만 곧 페테르의 발걸음을 따라 하나둘씩 새로운 흔적이 생겨났다.

얼마나 걸었을까, 페테르는 차고 시린 공기가 점점 크게 느껴져 몸을 움츠렸고 낯선 옷감이 닿는 느낌에 그제야 입고 있는 옷을 내려다보았다.

먼저 보이는 건 두꺼운 검은 장화였다. 그 위로 붉은 띠로 둘러진 긴 치맛자락의 끝 부분과, 청색과 흰색의 실이 만나 반복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자수 패턴, 어깨 부분의 문양으로 시작해 손목에서 다시 붉은 실로 매듭짓는 흰색 바탕 소매, 허리에 묶은 두꺼운 노란 끈과 그 끝에 달린 알록달록한 솔들을 차례대로 둘러보았다. 그리고 머리에 덮고 있는 흰색 두건까지. 평소 페테르의 옷차림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고 당황스럽기까지 했지만 곧 그리 낯선 모습이 아니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언젠가 페테르의 엄마가 보여준 옛날 사진 속의 엄마의 옷과 틀림없이 꼭 같았으니까.

엄마는 페테르가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꼭 한 번씩 본인의 옛날 사진을 보여줄 때가 있었다. 어린 날 이 특별한 옷을 입고 얼마나 즐겁게 돌아다녔는지, 고향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하는 말들을 늘어놓으면서. 그리고 끝에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네 이름도 바로 거기서 온 거야. 어릴 때는 고향 집과 가장 가까운 도시면서 동경의 세계였고, 어느 정도 커서부터는 삶의 터전이었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모두 거기서 일어났고 인생에서 가장 큰 슬픔도 그곳을 떠날 때 일어났지. 이제 다신 돌아갈 수 없는 곳이면서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이지만, 난 너를 부를 때마다 매 시간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곤 해.

페테르는 그 말을 굳이 꼭 기억하려 하지는 않았지만 이제 보니 무의식 중에 남아있던 모양이었다. 마치 방금 전에 들은 것처럼 세세하게 떠오름과 동시에, 그제야 아까부터 어딘가 모르게 타국의 향신료스러운 향기가 자신에게서 흘러나오고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정확히는 옷에서부터 나는 향기였다.

그와 함께 페테르의 시야에 놓인 새하얀 눈길에도 어떤 변화가 생겼음을 알 수 있었다.


발자국을 남길 때마다 뻣뻣한 소리를 냈던 눈은 미묘하게 부드러운 질감으로 변했고, 갑자기 어디서부터 나타난 것인지 모를 진녹색 빛 잎사귀들이 눈길의 가장자리를 따라 줄기를 길게 이어가고 있었다. 초록 점들이 점점 개수를 더해가고, 풋풋한 풀내가 페테르의 주위를 새롭게 바꿔놓았다.

슬로 모션처럼 바뀌는 환경 속에서 계속해서 앞을 향해 걸었다. 부드러웠던 눈은 질퍽거리며 녹는 대신 흰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이제 그 아래 감춰졌던 흙이 점점 모습을 드러냈다. 따사로운 햇빛이 페테르가 있는 곳을 조명등처럼 밝히자, 발아래 자잘한 나뭇가지와 약간 물기가 남은 나무껍질이 뒤섞인 땅의 색이 이전보다 진하며 선명해졌고, 페테르는 마치 한창 타들어 가는 장작 같은 냄새가 슬그머니 코 끝을 타고 올라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길이 끝없이 이어지다 못해 어쩌면 원형의 땅 위를 걸어 나가듯 같은 곳을 다시금 계속해서 지나가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의심이 들 무렵, 새로운 장소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페테르가 걷는 길을 따라 쭉 이어지던 녹색빛 잎줄기들이 이제는 덩굴처럼 서로 이리 얽히고 저리 얽히면서 점점 독특한 패턴의 거대한 문을 만들어 냈다.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형태의 울타리이자 문들은 길을 따라 연달아 생겨났고 페테르는 그 옆을 걸으며 다양한 자연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먼저 싱그러운 풀내를 한껏 들이켜보았다. 군더더기 없는 푸른 이파리 냄새였다. 길가의 문을 이루는 유려한 녹색 곡선 끝에 붉은 열매가 맺힐 때마다 베리류의 달콤한 향기가 공기 중으로 짙게 퍼져나갔으며, 어디선가 바람에 밀려 날아온 진노란 잎들이 페테르의 머리칼을 흩트리고 지나갈 때는 시큼 상큼한 시트러스 향기가 뒤따라와선 코를 장난스레 휘감기도 했다.


한낮의 햇살 같았던 따스한 노란빛은 어느덧 불그스름한 노을로 고여 하늘에 맺혔고, 땅에 남은 잔광이 녹색 문 너머의 곳을 비추었다. 그제야 페테르는 끝없이 이어지는 문 너머에 또 다른 세상이 있으며 그곳이 진짜 가야 할 목적지라는 걸 깨달았다.

밝고 어두움이 분명히 드러나는 주홍빛이 천천히 문 너머의 도시의 윤곽을 선명한 선으로 그렸고, 곧 도시의 선이 찬란하게 빛이 났다. 그렇게 마침내 페테르는 낯설면서도 왠지 그리운 기분이 드는 유럽의 한 오래된 도시를 마주할 수 있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지만 그냥 느낌만으로도 알았다. 페테르의 가족이 가지고 있는 과거의 향수가 이렇게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치맛자락에 짙게 배어 있던 향신료 향은 어느새 저편으로 먼저 건너가, 낯선 도시 속에 은은하게 머물며 페테르가 건너오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때마침 살랑이는 바람을 타고 날아온 붉은 과실의 향기가 다시금 주위를 맴돌았고, 페테르는 부드럽게 일렁이는 달콤한 향기를 따라 문을 활짝 열고서 그 너머의 주홍빛 웅덩이로 퐁당 빠져 사라졌다.

솜뭉치처럼 푹신한 털로 무장한 고양이가 앞발로 페테르의 얼굴을 툭툭 건드릴 때까지 긴긴 여행을 떠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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