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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래고래 Aug 16. 2024

헤세의 편지

열일곱 아들에게 보내는 문학 편지 #20

      

한국에 나를 닮은 젊은이가 있다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편지합니다. Guten Tag! 듣기에 당신은 여러모로 나의 젊은 시절을 닮았습니다. 그림을 좋아하고 음악을 즐기며 시 쓰기를 시도하고 날카로운 비평을 하며 무엇보다 생각이 깊다고 하더군요.     


당신 아버지가 나에 대해 소개한 열한 번째 편지를 읽어보았습니다.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특히 내가 그림에 대해 얼마나 진지했는지, 그림을 팔아서 생계에 보탬이 될 정도가 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까지 당신에게 알려준 건 썩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신도 어린 시절 수년간 그림을 즐겨 그렸죠. 다섯 살 전후로 그린 그림이 너무 많아서 온 방을 당신의 그림으로 도배하기도 하고 미술 선생님의 권유로 서울에서 그림을 전시하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요 몇 년 새에는 아크릴 물감으로 색채와 구도에 집중하면서 추상화를 시도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도 그림의 매력을 느낀 적이 있는 거겠죠. 또 초등학교 6학년 때에는 한국 현대사를 만화 형식으로 요약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메시지를 시각화한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당신은 시각적 표현 능력을 지닌 듯합니다.      


6~7년간 클라리넷에 몰두했던 사실도 흥미로웠습니다. 청소년 오케스트라 활동도 했더군요. 나도 문학 작품에서 음악을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간 적이 많고 음악가를 주된 인물로 등장시키기도 했습니다. 소설 “싯다르타”의 전개 구도가 소나타 형식과 유사하다는 건 “헤세와 함께 음악이 흘렀다”(이신구 지음, 세창미디어, 2022)에서 밝혀지기도 했었죠. 한 가지 악기를 꾸준히 연습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소리의 색깔과 그 색들의 조화에 대해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당신은 거의 50여 년에 가까운, 197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 유행한 노래들을 듣는다고 하더군요. 시대를 넘나들며 명곡을 찾아 듣는 귀를 갖고 있다는 건 그 자체로 귀중한 재능입니다. 노랫말이 시와 비슷하다는 점도 알고 있겠죠. 노랫말을 쓰기 위해서 기울이는 노력은 시인의 작업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당신은 시도 자주 씁니다. 3년 전일까요. 국립현충원에서 끝없는 묘비 행렬을 보고 쓴 시는 여러 면에서 당신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공간을 묘사하면서 동시에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조용히 이글거리는 슬픔을 포착한 필치는 그중 백미였습니다. 나중에 어느 공모전에 여러 편의 시를 출품한 적도 있었죠. 당선 여부와 상관없이 그런 대회에 도전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우울에 빠져있던 나의 청소년기보다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당신도 나처럼 내면의 방황을 겪고 있을 텐데 그런 중에도 시를 매개로 내면을 표현했다는 점은 높이 사고 싶습니다.      


그리고 비평. 비교하여 평한다는 건 비교의 잣대가 분명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고 또한 평가하려는 대상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당신이 그 어려운 수준에 오를 가능성이 보인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고 온 평을 부탁하자 당신은 ‘추상화 같다’는 한마디로 정리했습니다. 추상화는 그 자체로 수수께끼와 같아서 해석하기 어렵지요. 하지만 해석의 폭이 자유롭기에 사진처럼 정교한 그림과 달리 볼 때마다 색다른 감동을 주기도 합니다. 영화가 추상화 같다는 건 해석하기 어렵게 고도로 추상화된 메시지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고 그 수수께끼를 풀어가도록 의도된 작품이라는 뜻이기도 하겠습니다. 어쨌든 영화평이 보통은 ‘재밌다, 재미 없다’로 끝나는데 당신의 평은 촌철살인, 정곡을 콕 짚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국 대중음악의 부진한 성장에 대해 날카롭게 비평할 때도 있었습니다. 우리 가요가 언젠가부터 느리게 성장하거나 어쩌면 성장을 멈춘 것 같다는 취지로 몇십 년 전의 성장기와 요즈음을 비교하면서 근거를 제시했었죠.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평을 듣는 순간의 놀라움은 기억합니다.      


당신의 아버지가 나를 소개할 때 한나 아렌트의 세 가지 인간 조건, 노동-작업-행위를 줄기로 삼아 세 측면을 분석했었지요. 대체로 맞는 말이지만 완전히 맞지는 않습니다. 왜냐면 내가 세 가지 다른 인격을 지닌 것은 아니기 때문이죠. 그 세 측면의 바탕이 되는 욕구와 기질에 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 나는 표현하는 사람이며 작업하는 인간입니다. 내 안의 무엇을 여러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소설로, 동화로, 시로, 수채화로 표현합니다. 끊임없이 표현한다는 것은 내 안에 마르지 않는 우물이 있어서 더 깊은 내면으로 바가지를 던져서 물을 길어낸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작업이 괴롭고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회복해야 합니다. 나는 정원 일에 열중하면서 또 나무를 사랑하면서, 자연과 나의 관계에 집중하면서 놀라울 정도로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조국이 세계를 상대로 벌인 전쟁 범죄에 대해 비판한 것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 즉 사회 관계에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노력한 모습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정치가다운 기질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누구에게나 소중한 인간성을 국가라는 이름으로, 아리안족의 우수성이라는 이름으로 짓밟는 전체주의에 저항한 것이며 무엇보다 한 인간이 지닌 고유성을 인정하지 않는 전체의 폭력성에 저항한 것입니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라는 소설에서 두 인물이 걸어가는 성화의 길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 둘은 그렇게 대비되는 삶을 살면서도 서로를 존중하고 또 그렇게 다르기 때문에 상대에게는 없는 삶의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아갈 자유와 힘을 가져야하기에 젊은이들을 총알받이로 낭비하는 전쟁을 비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간성은 자신만의 색깔을 드러내는 인생에서 자연히 빛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나를 표현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표현. 나를 드러내는 일은 어렵습니다. 조용한 관객으로 남아있다가 조심스레 퇴장하면 아무런 비난도 받지 않는데 굳이 자신을 무대 위로 올렸다가는 여기저기서 비난이 날아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표현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비난도 칭찬도, 후회도 격려도, 만남도 성장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드러낼 가치가 없는 모습도 있지요. 아무 때나 아무 것이나 그저 내 것이라면 최고라는 식으로 자만에 빠져서는 곤란합니다. 다행히 당신은 비평의 눈을 지니고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당신처럼 좋은 눈을 가진 사람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습니다. 바로 대가의 작품과 자신의 것을 일 대 일로 비교하는 함정입니다. 셰익스피어가 쓴 작품에 내 초고를 비교한다면 초라하게 보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 나올 가치가 없는 것인가? 아닙니다. 우리는 젊은 작가의 작품이 완벽해서 칭송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이 보이기에 격려합니다. 당신의 작품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Near Perfection! 완벽에 가깝다면 표현하길 주저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얼마나 가까워야 충분히 가까운지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당신 자신을 포함해서. 신만이 아십니다.     


경험. 표현을 하기 위해서는 경험이 중요합니다. 현충원에 가지 않았더라면 당신의 시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물론 경험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살다보면 여러 경험이 쌓이겠지만 경험의 가치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겁니다. 경험을 중시하는 사람은 가급적 다양한 경험을 하기 위해 애씁니다. 그리고 경험이란 건 많을수록 좋다고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경험이 그저 한번 해본 것으로 끝난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시간 낭비, 돈 낭비입니다. 경험이 가치 있으려면 내 삶에 도움이 되어야 하지요. 예컨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벌어보는 것은 가치가 있습니다. 돈으로 움직이는 세상의 한 측면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행을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경험도 좋습니다. 나와 달리 살아온 사람에게서 내게 부족한 면을 찾을 수 있으니까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서로에게는 없는 결정적인 한 조각씩을 갖고 있었던 것처럼요. 대학에 가서 학문에 도전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수백 년 동안 쌓여온 학자들의 지혜를 체계적으로 전수 받을 수 있으니까요. 수백 년의 지혜를 4년 안에 흡수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경험이 당신의 표현을 풍부하게 해주리라 믿습니다. 항아리에 물이 가득 차야 비로소 물이 넘치듯이 좋은 글이 나오려면 당신의 내면에 있는 거대한 항아리가 찰랑찰랑 경험으로 채워져야 할 것입니다.      


생각이 깊은 당신. 신이 있다면 당신은 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탐욕스럽지 않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며 왁자지껄 떠들기보다 말과 행동을 다듬고 부산스레 움직이기 전에 해야할 이유가 분명해질 때까지 숙고하는 모습은 모두 축복의 증거입니다. 그런데 그렇기에 세상에서 당신은 쉽게 자리를 찾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탐욕스럽다는 건 제 몫을 찾는 데 능하다는 뜻이기에 돈이든 지위든 명예든 그 사람들 차지가 되기 쉽고, 왁자지껄하다는 건 좌중을 압도한다는 뜻이기에 집단의 결정이 그 사람들 의지에 따르기 쉽고, 부산스레 움직인다는 건 민첩하고 주도면밀하다는 뜻이기에 당신보다 한발 앞서서 자리를 차지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서양 격언처럼 세상에서 통용되는 질서는 고귀하고 고결한 것이 아닙니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나쁘기까지 한 것들입니다. 이런 질서를 당신은 본능적으로 혐오할 텐데 그럴 때 오히려 비판을 받을 겁니다. 잘난 척한다고 배척될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군대에서 그런 일이 생길 가능성이 큽니다. 힘과 권력으로 약자를 억압하는 일이 자연스러운 세계에 당신이 동조할 리가 없기 때문에 군대 내무반 생활이 어렵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내가 젊은 날 권총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세상과 화목하지 못했다는 걸 아버지의 편지로 알고 있지요? 당신에게 타협을 권하는 것이 아닙니다. 라인홀드 니버의 기도처럼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함을,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그 둘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길 바랄 뿐입니다.      


그렇지만 다시 강조합니다. 당신은 신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모습은 일곱 살 무렵 때 길거리에서 푸성귀를 팔던 할머니들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대신 오백원을 주려고 했을 때 아름답게 드러났습니다. 남보다 위에 올라가려는 의도에서 베푸는 것이 아니라 천성이 남이 잘되기를 바란다는 뜻이지요. 그 아름다운 심성을 유지하시고 당신과 비슷한 사람을 만나 행복하십시오. 그것이 신의 계획일 것입니다. 그리고 말과 행동을 다듬고 자신이 해야할 이유가 생길 때까지 숙고하는 태도는 인생에서 실수와 낭비를 줄여줄 것입니다. 가치 있는 일을 생각해내고 그 일에 몰두하십시오. 이것저것 기웃거리기에는 인생이 허락하는 시간이 너무 짧습니다. 내가 여러 사람들의 인생을 보면서 한 가지 알게 된 점은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얻는다는 겁니다. 돈을 원하는 사람은 결국 돈을, 자유를 원하는 사람은 자유를, 권력을 원하는 사람은 권력을 언젠가는 어떤 방식으로든 얻게 되더군요. 그러니 무엇을 원하는지가 중요합니다. 당신은 신중하기에 실수가 적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본인의 선택을 믿고 과정의 실수를 메워가며 꾸준히 노력하기를 권유합니다.      


이제 편지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당신의 아버지가 지난 열아홉 통의 편지로 문학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전했다고 하더군요. 아마도 그에게는 그게 가장 중요했나 봅니다. 어쩌면 그것밖에 줄 것이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보통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야기하기를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이 편지는 그가 전하는 거의 유일한 말일지도 모릅니다. 그 외의 이야기는 하지 않음으로써 당신이 스스로 이야기를 채워가기를 바랄 수도 있구요. 어느 편이든 당신에게 편지를 썼다는 건 말을 건냈다는 뜻이고 대화를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답장을 바란다기보다 긴 인생을 통해 답변해주기를 기다린다는 뜻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의 나이 사십 중반. 고등학생까지는 세상의 방식에 순응했기에 진정한 그의 인생이 스물에 시작했다고 한다면 약 25년간 그가 인생에서 어떤 방황을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아들만큼은 그런 방황을 줄이기를 바랄 겁니다. 방황과 경험은 다릅니다. 그는 당신이 방황보다 경험을 하기를 바랄 겁니다.      


나의 인생도 평탄하지 못했습니다. 가족들에게 상처도 줬습니다. 그래도 나는 평생 표현을 해왔습니다. 어제의 나를 넘어서는 경지에 도전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다가올 세상은 진짜 같은 가짜가 넘쳐난다고 합니다. AI가 순식간에 노래를 그림을 심지어 교향곡까지도 그럴듯하게 만들어 냅니다. 사람들은 진짜 같은 가짜에 만족할 겁니다. 적당히 괜찮으면 심지어 공짜면 다 좋다고 할 겁니다. 여기서 당신의 진가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어제의 나’에 도전하는 사람들만 작지만 결정적인 차이를 분간할 수 있습니다. 민감한 더듬이를 믿어보세요. 당신은 다재다능합니다.     


나를 닮은 당신, 이병주의 “지리산”에서 하영근이 박태영에게 기도하듯 당부했듯이,


자중자애하기를.          



- 당신 아버지의 부탁으로 마지막 편지를 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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