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아들에게 보내는 문학 편지 #18
한국이 공식적으로 일본 대중문화를 수입하기 시작한 때가 1998년이란 걸 알고 있니? 일제 강점기의 상처가 50여 년이 넘어서야 겨우 조금 치유되었는지 양국 정부의 합의에 의해 98년에 영화와 음악 일부 수입, 99년에 일본 영화의 극장 개봉(“러브레터”가 큰 인기였지)과 애니메이션 제한 방영, 그리고 2004년에야 완전 개방되었어.
98년 여름 농활, 지브리에서 만든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를 해적판으로 봤었는데 정말 충격이었지. “이웃의 토토로”는 말할 것도 없고 “철도원”, “4월 이야기” 영화도 섬세한 일본 감성이 잘 드러난 영화였어. 우타다 히카루의 ‘First Love’라는 앨범도 인기였는데 이 노래는 최근 “하츠코이”라는 넷플릭스 드라마로 나와서 우리나라에서도, 엄마에게도 큰 인기를 끌었어. 노래를 드라마로 만들다니...
그런데 말이야. 일제 강점기의 만행, 그리고 ‘난징 대학살’이라고 불리는 중국 난징에서 벌인 미개함을 넘어 처참한 수준의 살육, 또 동남아 여러 나라를 지배하면서 그들에게도 우리와 비슷한 슬픔을 남겼던 역사, 여전히 기고만장한 일본 극우 세력... 한편 이런 모습과 너무나 대비되는 섬세하고 세련된 서정적인 문화! 그뿐 아니라 2000년에 홈스테이로 보름가량 머무르며 만났던 일본 가족들의 따스함이 느껴지면서 내 안에서 두 가지 상반된 이미지가 해석이 불가능할 정도로 멀어져버린 거야.
알고 싶었어. 둘 다 일본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싶었어.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문학, 음악, 역사 등을 통해 탐구할 수도 있겠고 사회과학적인 관점에서 정치, 사회 구조를 분석하면서 알아갈 수도 있겠지. 당시 나는 정외과 학생이었기 때문에 사회과학이 좀 더 끌렸어. 마침 같은 학번 동기들과 공부 모임이 만들어졌지. 한국, 일본, 중국의 근현대 정치변동을 공부하자는 취지였고 모임의 이름은 ‘지진’이었어. 지혜와 진실의 앞 글자를 따기도 했고 동북아 3국의 정치변동이 마치 지진처럼 강력하다는 뜻도 있었지. 그 모임에서 지리산 자락 어느 절에 며칠 머물면서 읽고 토론했던 글이 바로 마루야마 마사오의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였단다.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1997, 한길사)”이라는 책에 실린 논문이야.
정치 사상의 스펙트럼으로 보자면 맨 왼쪽, 극좌 세력으로는 무정부주의가 있고, 바로 옆에 진보로서 사회민주주의, 중간을 넘어 오른쪽으로 오면 보수로서 자유민주주의가 있고, 오른쪽 끝, 극우가 파시즘인데, 2차 대전기에 일본이 보인 행태를 일반적인 파시즘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일본만의 특수성이 있지 않겠냐고 생각하면서 ‘초超’, ‘Ultra’라는 말을 붙여서 Ultranationalism라는 단어를 중심개념으로 분석한 논문이야. 그래, 뭔가 극단적인, 상식을 훌쩍 넘는 듯한 그런 집단 행태를 설명하려면 일반적인 국가주의로는 어렵고 ‘초월적인’ 국가주의 정도는 되어야겠지.
초국가주의란 국가를 절대화하는 믿음 체계야. 국가의 이름으로 못할 일이 없지. 구체적으로는 ‘천황’의 이름으로. 일본에는 허울뿐인 천황이 있는데 소수의 핵심 세력이 자신들의 과두 통치를 합리화, 합법화하기 위해서 천황이라는 신격화된 존재를 내세웠거든. 신비화된 어떤 존재를 일본 국민들이 무작정 따르도록 의식화시켰어.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에 진주한 일본 군인, 그중에서도 말단 군인을 상상해보자. 그 군인은 계급 체계상 맨 아래에 있지만 자신은 황제의 군대이고 황군이라는 조직은 일본 안에서도 다른 어떤 사회조직보다 우위에 있단 말이야. 그러니 조선에서는 어떻겠어. 조선의 왕이라고 하더라도 자신보다는 서열상 아래에 있다고 여길 정도였지. 그러니 평범한 조선인들은 벌레처럼 취급하는 게 당연해. 그런 심리가 난징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고도 남을 가공할 폭력으로 발현되었고... 달리 말하면 천황의 빛과 은총이 닿는 동심원 안에 있는 사람은 그 범위 밖에 있는 사람에 대해 절대적인 우위를 갖고 있어.
왜 이런 정도로 극단적인 국가주의가 득세하게 되었을까. 두려움과 불안 때문이지. 일본 국민들은 끊임없는 사회 불안에 시달렸는데 이런 두려움을 해결해줄 수 있는 존재는 ‘국가’뿐이었으니까. 여기에 전통적인 유교적 가치관, 가족적 세계관과 맞물려 국가의 권위를 비판하면 안되고 무작정 따라야 한다는 그런 집단 심리가 확산되었다는 거야. ‘나 하나 죽는 건 아무 일도 아니다, 국가가 먼저 살아야 우리 가족이, 우리 모두가 산다’는 식의 생각이 있었으니 자살특공대까지 생겼겠고... 혹시 옥쇄玉碎 정신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니? 옥이 부서진다는 뜻인데 보석 같은 명예와 충절을 일부러 부순다는 건 전투에서 패배한 군인들이 항복보다 집단 자살을 선택하는 특유의 문화를 뜻하는 말이야. 그런데 2차 대전 말기 원자폭탄이 투하되면서 일본의 패망이 거의 분명해지자 일본 국민들은 본토에서 미군과 전투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했고 그 경우 항복보다는 모두 할복의 각오로 싸우다 죽어야 한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퍼지게 되었어. 다행히 천황의 항복 선언으로 현실화되지는 않았지만 만약 천황이 옥쇄 정신을 부채질했다면 집단적인 자결이 정말 일어났을지도 몰라.
2차 대전 후에 강제로 찾아온 평화 시기에도 일본인들의 군중심리에 큰 변화가 없다면, 초국가주의의 논리가 여전히 강력하다면 미국을 위시한 연합국이 아무리 민주적인 정치 제도를 이식하려 해도 그건 껍데기일 뿐이겠지. 언제든 극단적인 파시즘이 나타날 수 있으니까. 그러지 않으려면? 건강한 개인의식이 필요하고, 또 집단 속의 개인이 아니라 개인의 집합으로서 집단을 인식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전후 일본의 국민적 과제라는 점을 마루야마 마사오는 논문을 통해 제시했던 거야.
일본 사람들, 그 과제를 해결했을까? 그건 이민진의 소설 “파친코”에서 실마리를 찾아보자.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에 유학하거나 거기 사는 조선인들이 많았어. 그런데 광복 이후에도 주인공 선자네 가족은 귀국하지 않았는데 거기엔 여러 이유가 있었지. 십수 년 일본에서 자리 잡으며 마련한 생계 기반을 포기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선자의 내연남이었던 고한수, 야쿠자 조직에 연루되어 있으며 국제정세도 파악할 정도로 정보력이 뛰어난 고한수가 1950년 한국전쟁을 어느 정도 예상했기 때문이었어. 전쟁의 불바다로 굳이 뛰어들 필요가 없잖아. 남북으로 갈라진 상극의 정치체제는 부딪힐 수밖에 없다는 점을 예견했을 거야. 어쨌거나 선자네 가족은 남았어. 재일 교포라는 굴레를 쓰고 일상의 차별을 견디면서.
선자의 첫째 아들 노아. 노아는 공부도 잘하고 기꺼이 사회 질서를 체화하면서 일본에 흡수되려 노력했어. 조선인의 흔적을 지우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지. 하지만 여전히 재일 교포일 뿐이야.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제한되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파친코 사업이야. 도박이지. 일본인들은 그 사업을 경멸하면서도 즐기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더러운 일이니까 운영은 재일 교포에게 맡기고 싶었을 거야. 노아는 평범한 직장인이 되고 싶었지만 결국 파친코 사업을 하게 돼. 그렇게 위태롭게 살아가던 중에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는데 목사였고 고고하고 깨끗한 영혼을 지닌 아버지의 자식이 아니라 그보다 엄마가 먼저 만났던 고한수, 한국인이지만 야쿠자로서 실력을 발휘하던 고한수의 자식이라는 걸 알고는 끝내... 자살하지. 평생 억울한 차별을 받았지만 자신과 가족의 도덕성만은 순수하다고 자부했을 텐데...
선자의 둘째 아들 모자수. 그는 미국으로 유학하여 다국적 금융회사의 매니저가 될 만큼 유능했어. 미국에서 경력을 쌓다가 일본 자회사로 파견을 오게 되었는데 여기서 다시 교포로서 차별을 경험해. 그러면서 자연스레 파친코 사업에 눈을 돌리지. 개인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어차피 성공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까? 결국 그는 파친코로 성공해.
집단 이지메(いじめ), 집단 괴롭힘 문화가 재일 교포들에게 드러나는 걸 보니 일본인들은 마루야마 마사오가 제시한 국민적 과제를 해내지 못한 걸까? 물론 한두 사례로 판단하긴 어려워. 반대 사례의 예로 지방자치의 성공이 있지. 일본은 중앙정치는 별로지만 지방자치는 잘되었다고 평가하는 시각이 있는데 그건 바로 혁신자치체운동(日本革新自治体運動) 덕분이야.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까지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정책을 추진한 지방정부들의 활동을 말해. 주로 사회당이나 공산당과 같은 진보적인 정당에 의해 주도되었어.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정책에 힘쓰면서 국가라는 이름에 가려졌던 수많은 보통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 같아. 물론 이 역시 집단적인 접근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정책의 초점이 개인의 행복으로 옮겨왔다는 점은 큰 변화겠지.
“파친코”의 저자 이민진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그녀는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민 왔으니까 이민 1.5세대라고 불러야겠지. 어려서부터 차별에 대해 민감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겠고 자연히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많았을 거야. 그러다가 1989년에 교토에서 공부하며 재일 조선인들의 이야기를 처음 접하게 되었고 이후 거의 30년에 걸쳐 자료를 조사하고 이야기를 만들어서 2017년에 소설을 발표했다고 하네. 그 많은 인터뷰와 현지답사를 통해서 은밀한 가족사를 밝혀냈기에 그토록 생생한 묘사가 소설에 가득 담길 수 있었겠지. 기억나니? 첫 번째 편지에서 이병주 작가의 문학론을 소개하면서 그가 즐겨 쓴 문구를 소개한 적이 있었어. “역사는 산맥을 기록하고 나의 문학은 골짜기를 기록한다”, “태양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이민진이야말로 이병주처럼 골짜기에 비친 월광을 보여준 작가구나.
한 이야기를 삼십 년 정도 준비한다는 것이, 가브리엘 마르케스가 23년간 준비해서 “백년의 고독”을 쓴 것처럼, 소설가의 생애에서 그 작품은 어느 정도의 무게일까? 그래봤자 이야기일 뿐인데... 안 읽으면 그만인 소설일 뿐인데... 2017년 출간 직후 세계인들의 환호를 받았던 “파친코”는 단지 재일교포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민자 모두의 공감대를 불러일으켰고 더 넓게는 주류와 비주류의 이야기, 국가와 개인의 이야기, 2차 대전 전후의 힘겨운 세대의 이야기로 읽혔기에 누구에게나 재밌는 이야기가 되었던 것 같아. 공감의 폭을 무한히 넓히는 데 성공했다는 뜻이지. 문학이 공감을 추구하는 예술이라면...
오늘은 이만 마칠까. 다음 주에는 생태 문학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스무 편으로 마칠 예정이니 이제 정말 끝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다음 편지에서 만나자. 안녕!
- 배링턴 무어가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에서 다룬 일본의 이야기와 그의 이론을 비판한 논문을 소개하지 못한 아쉬움을 남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