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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래고래 Aug 04. 2024

도요새의 에코토피아

열일곱 아들에게 보내는 문학 편지 #19

오늘은 “도요새에 관한 명상”(김원일 지음, 문학과 지성사, 1979)과 “에코토피아 뉴스”(원제, News from Nowhere, 윌리엄 모리스 지음, 1892, 한국어 번역은 필맥 출판사에서 2004년)라는 두 소설을 중심으로 생태 소설과 생태 사상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1979년에 이런 소설이 나왔다니 놀라운데, 김원일 작가는 이 중편 소설에서 인상적인 세 인물을 보여줘. 아버지와 두 아들. 아버지는 실향민으로 평생 외롭고 소심하게 지내는데 자주 바닷가로 나가 도요새를 보면서 이북 고향 바다에서 봤던 새라며 반가워하지. 첫째 병국은 수재로 서울대를 간 것으로 나오는데 학생운동에 휘말려 제적을 당하고선 고향에, 여기선 경남 어딘가, 동해안과 남해안이 만나는 곳으로 나와, 낙향하여 공해와 새 문제에 빠지게 되지. 둘째 병식은 재수생이고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인데 도요새를 독살시켜서 박제사에게 팔아 용돈벌이나 하려는 인물이야.      


세 사람에게 도요새는 각기 다른 의미야. 아버지에게 도요새는 실향민으로 느껴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투영된 존재고, 첫째에게 도요새는 공업화로 인해 파괴되어가는 순수한 자연을 상징하는 존재이며, 둘째에게 그 새는 아버지와 형이 왜 좋아하는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그래서 몇 마리쯤 죽여서 돈벌이에 써도 괜찮은 사물에 가까워.      


첫째의 심리와 행동이 주목할 만한데 대학에서 민주화 운동으로 인해 퇴학당하고 내려와 고향 산천을 보니 여기서는 또 다른 차원의 황폐화가 이뤄지고 있었던 거야. 70년대 독재 정권에 의한 민주주의의 황폐화와는 사뭇 결이 다르지만 독재 정권의 최대 업적인 경제성장, 그 첨단에 있던 대규모 공업단지에서 내뿜는 오폐수가 하천은 물론 바다까지 흘러가 뭇생명에게, 특히 그곳을 일년에 두 번 정착지로 삼아온 도요새에게 말 그대로 황폐화된 환경을 강요했던 거지. 더구나 이웃 나라 일본에서 이타이이타이병으로 대표되는 공해병이 사회문제가 되면서 일본식의 공업화를 그대로 따라가는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질병이 생기리라는 걸 조금만 생각해도 깨달을 수 있었거든. 1991년 두산전자 공장에서 두 차례나 페놀이라는 공업 물질이 낙동강으로 대규모로 유출되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어. 첫 사고에서 30톤이나 되는 페놀이 유출되었으니... 강은 지옥으로 변했겠지.      


“에코토피아 뉴스”는 130여 년 전 소설이구나. 저자인 윌리엄 모리스는 1834년 영국에서 태어나 1896년에 돌아가셨고 다재다능한 분이어서 디자이너, 시인, 소설가, 번역가이자 사회주의자, 유토피아 사상가였다고 해. 소설의 원제목이 “News from Nowhere”이니까 아마도 nowhere는 유토피아를 뜻하겠지. 번역을 맡은 박홍규 선생, 이 분의 삶에 대해서는 따로 편지 하나를 할애해도 될 정도야, 그분의 뜻인지는 몰라도 한국어본의 제목을 “에코토피아 뉴스”라고 지은 건 썩 잘한 일 같아.      


소설의 주인공은 자고 일어나보니 미래에 도착했는데 이 세상은 당시 사회주의자들이 이상향으로 생각하던 혁명 ‘후’ 세상이구나. 프롤레타리아 계급(무산 계급,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은 노동자)이 부르주아 계급(유산 계급,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을 유혈 혁명으로 말살하고나서 노동자만 남은 세상. 인간과 노동이 분리되지 않고 노동을 통해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거대 자본이 사라져 계급 구조도 사라지며 억압적인 국가 권력도 사라진 세상에서 자율적인 노동으로 자치 공동체를 이루는 세상. 이것이 당시 낭만적인 사회주의자들의 유토피아였을 거야. 이런 세상이 실제로 가능하다면 어떤 모습일지 윌리엄 모리스는 소설가다운 상상력으로 그럴듯하게 그려냈구나.      


윌리엄 모리스가 살던 당시 영국 런던은 그야말로 세계 자본주의의 최첨단 도시로서 온갖 종류의 산업화가 가속하던 곳이었는데 그래서 스모그 현상으로 많은 사람이 호흡기 질환으로 죽거나 병 나고 템즈강은 온갖 폐수로 오염되어 있었어. 그런데 소설의 배경은 21세기의 언젠가이기에 런던은 다시 깨끗한 공기를 되찾고 템즈강도 물놀이를 할 정도로 복원되었다고 나오거든. 그러니까 사회주의 혁명은 계급 모순의 타파는 물론 자연까지 회복하는 혁명이라고 믿었던 듯해.      


생태 사상에는 여러 갈래가 있는데 몇 가지 소개하자면, 첫째 심층 생태주의(Deep Ecology). 이 사상에 따르면 인간은 그저 수많은 생명체 중 하나일 뿐이고 삼라만상이 모두 소중하다고 해.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개인적 삶의 양식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어. 둘째 사회 생태주의(Social Ecology).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이 제안한 이론인데 환경 문제의 근본 원인이 사회적 불평등과 계층 구조에 있다고 해. 그래서 억압적인 사회구조를 변혁하지 않는 한 환경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고 하지. 셋째, 생태 사회주의(Eco-Socialism). 이건 두 번째 나온 사회 생태주의와 헷갈리는데 생태 사회주의는 어쨌든 ‘사회주의’야. 앞의 수식어가 생태일 뿐이고. 그래서 사회주의의 기본 강령에 따라 자본주의를 철폐하는 것이 생태적인 세상을 만드는 길이라고 생각해. 공공 소유와 계획 경제라는 사회주의 사상의 경제 양식, 즉 공산주의(communism, 공유주의로 번역하는 게 더 정확하지만)를 지지해. 자치와 분권을 강조하는 사회 생태주의와는 조금 다르지. 넷째로 에코페미니즘(Ecofeminism). 여성주의와 생태주의를 결합한 사상으로 여성 억압과 자연 파괴의 원인이 유사하다고 보는데 가부장적인 사회의 지배 구조가 환경 문제의 근본 원인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극복해야 생태 균형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해. 백인 남성으로 상징되는 서구 물질문명이 제3세계 여성으로 상징되는 자연을 착취해온 역사를 생각해보면 여성주의와 생태주의의 결합을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에코토피아 뉴스”는 생태 사회주의에 가까운 소설이야. 자본주의의 모순이 극대화되던 19세기 말의 영국에서는 이 체제가 무너져야 뭐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했겠지. 생태계의 회복도. 물론 자치 공동체가 활발한 분권화된 모습을 보면 사회 생태주의의 이상향도 일부 포함되어 있어. 그렇다면 “도요새에 관한 명상”에서 첫째는 어디에 가까울까? 학생운동을 했던 전력이 있으니 생태 사회주의자일까? 아닐 거야. 소설에서 그려지는 그는 사회주의 혁명가의 모습이 아니야.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는 새들, 공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주변화되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자연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경제성장에만 몰두하는 정권에 대한 분노가 느껴지는데 그걸 꼭 사회주의 혁명으로 해결하려고는 하지 않아. 사회 생태주의에 더 가까운 듯해.     


생태주의 사상을 이론적으로 구분하는 일은 참 멋지고 필요한 일이야. 나도 지금은 돌아가신 문순홍 선생의 책, “생태학의 담론”(아르케, 2006)으로 그 공부를 할 때 즐거웠지. 그런데 “도요새에 관한 명상”을 읽으면서 문학의 힘을 새삼 깨달았어. 왜냐면 사회 생태주의자인 첫째와 심층 생태주의자에 가까운 아버지가 비슷한 듯 다르게 도요새에 대해 생각하는 장면이나 개발주의자인 엄마(부동산 투기에 능한)와 생각 없이 개발주의에 동조하는 둘째가 아빠와 첫째와 겪는 갈등 장면은 생생하고 참 그럴듯하거든. 아무리 생태 사상을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다고 해도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상의 충돌을 이 소설처럼 분명하게 이해하기는 어렵지. 그래서 둘 다 필요한가봐. 사회과학적 분석과 인문학적 사유.      


아빠가 대표집필자로 쓴 책이 있단다. “녹색 헌법: 개헌에 신중한 당신에게 띄우는 서른 통의 편지”(녹색전환연구소 지음, 이매진 출판, 2018). 초고를 써서 여러 출판사에 섭외 편지를 보내고 녹색전환연구소 주최로 토론회를 개최하며 최종 원고를 써서 출간하기까지 모든 과정을 경험해봤어. 2018년은 문재인 대통령이 개헌안을 발의할 만큼 개헌 논의가 치열하던 때인데 나는 녹색의 가치가 모든 헌법 조문에 담겨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그리고 이 책은 문순홍 선생이 젊은 연구자들과 함께 수년간 노력해서 집필하신 역작, “개발국가의 녹색성찰(녹색국가연구1)”과 “녹색국가의 탐색(녹색국가연구2)”에서 영향을 받은 거야. 두 권의 연구서에는 국가의 각 영역을 녹색화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구상과 제안이 담겨 있는데 연구의 후속 과제 중 하나가 바로 헌법의 녹색화였거든. 도요새도 행복한 에코토피아가 되려면 어떤 국가가 되어야 할까... 그런 뜻에서 헌법의 녹색화에 도전해봤어. 기본권뿐 아니라 전문, 총강, 입법, 행정, 사법, 지방분권, 경제, 헌법개정의 모든 영역에 녹색 가치가 스며들도록... 개헌은 이뤄지지 않았고 녹색 헌법도 공론화되지 않았지만 국가를 녹색화해야한다는 뜻에는 변함이 없어.      


서울대 다니고 한자리 꿰차서 집안을 일으킬 희망이던 첫째 아들이 갑자기 새에 미쳐서 폐인이 되었다고 믿는 ‘엄마’에게 첫째가 하고 있는 ‘도요새에 관한 명상’은 부질없을 뿐만 아니라 위험한 정신병이겠지만 그래도 이 소설이 발표되던 1979년에 김원일 작가는 벌써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의 경고 덕분인지 우리는 일본처럼 끔찍할 정도로 공해병을 겪지는 않았구나. 그리고 윌리엄 모리스의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은 딱딱하고 어려운 생태 사회주의의 강령보다 더 쉽고 생생해서, 그래서 더 희망차게 제시되었을까. 자본주의는 그 많은 모순을 조금씩 해결해서 지금과 같은 모양에 이르는 데 성공했구나. 물론 제국주의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전 세계로 확산하고 그래서 세계대전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점진적이고 자생적인 개혁이 일어난 건 아니었지만.      


지난 수백 년간 문학은 인종, 노동, 성차별, 계급과 계층, 민족, 전쟁, 도시화, 이민과 같은 거대한 사회 변화에 주목해왔어. 우리네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사건들이기에 그로 인해 생겨나는 이야기들이 기록할만한 가치가 있었던 거지. 그런데 이제는 생태 위기의 시대야. 자연의 복수라는 단순한 비유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한없이 자애로운 자연이 아니라 망가져 버린 그래서 삶의 터전을 위협할 정도가 되어버린 무서운...       


생태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문학의 힘을 알기에 생태 가치를 문학으로 전파하려는 사람들이겠지. 적지만 참 소중한 사람들이야. 이런 이들을 위해서 국립생태원에서는 매년 생태문학 공모전을 여는데 올해로 벌써 9회차라니... 다행이구나. 오랫동안 문학가들은 기발한 상상력과 풍부한 감수성으로 세상에 대한 통찰을 주었는데 이제는 그 힘을 생태 사회를 위한 쪽으로 발휘해줬으면 하는 바람이야.      


오늘은 이만 마칠까. 다음 주 마지막 편지에서 만나자. 안녕!          


-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낸 해시태그 문학선 “#생태 시”와 “#생태_소설”을 추천하면서 “#생태_시”에 있는 시 세 편을 전하며               



달무리     


천양희, 『새벽에 생각하다』, 2017     


달밤에는 달과 밤이 있다

달의 밤에 밤의 달에

마음이 하늘로 들린다

오늘 밤도 달이 있어 나는 생각한다

이 밝음 속에 소란한 소음 하나 놓아두면

달빛에 겨워 소음조차 조용히 침묵하겠지

그 생각이 무리였나

달에도 무리가 있었나 달빛이 기울었다

달은 무리지면 밤길 훤하지만

사람은 무리지면 무서운 것이니

무리하지 말고 살아야지     


나뭇가지 위에 달빛이 걸릴 때만

뜨거운 것이 내 얼굴에 얼룩진다

나는 이미 시인이 되었지만

달밤이 없었다면 무리진 죄인이 되었을 것이네     


나를 감동시키는 것으로

하늘에 달만 한 것이 없네               




聖 느티나무     


나희덕, 『사라진 손바닥』, 2004     


속이 검게 타버린 고목이지만

창녕 덕산리 느티나무는 올봄도 잎을 내었다     


잔가지 끝으로 하늘을 밀어 올리며 그는

한그루 용수榕樹처럼

제 아궁이에서 자꾸만 잎사귀를 꺼낸다

번개가 가슴을 쪼개고 지나간 흔적을 안고도

저렇게 눈부신 잎을 피워내다니,

시커먼 아궁이 하나 들여놓고

그는 오래오래 제 살을 달여 내놓는다

낮의 새와 밤의 새가 다녀가고

다람쥐 일가가 세 들어 사는,

구름 몇 점 별 몇 개 뛰어들기도 하는,

바람도 가만히 숨을 모으는 그 검은 아궁이에는

모든 빛이 모여 불타고 모든 빛이 나온다

까마귀 깃들었다 날아간 자리에

검은 울음 몇 가지가 뻗어 있기도 한다     


발이 묶인 채 날아오르는 새처럼

덕산리 느티나무는 푸른 날개를 마악 펴 들고 있다        



       

물을 만드는 여자     


문정희,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2004     


딸아, 아무 데나 서서 오줌을 누지 마라

푸른 나무 아래 앉아서 가만가만 누어라

아름다운 네 몸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미는 소리에 귀 기울여보아라

그 소리에 세상의 풀들이 무성히 자라고

네가 대지의 어머니가 되어가는 소리를     


때때로 편견처럼 완강한 바위에다

오줌을 갈겨주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제의를 치르듯 조용히 치마를 걷어 올리고

보름달 탐스러운 네 화초를 대지에다 살짝 대어라

그러고는 쉬이쉬이 네 몸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밀 때

비로소 너와 대지가 한 몸이 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푸른 생명들이 환호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내 귀한 여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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