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IJO 지나친 조각들 Apr 13. 2020

[프랑스 척척석사 생존기] 불편합니다 (1)

불편함을 짓밟는 방법 - 노골적인 교수의 무시


더 이상 나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굳이 이런 상황을 겪어야 하는 이유도. 그리고 나만이 그들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다시는 가만히 웃으면서 받아내지 않겠다고. 눈물로 베갯잇을 적신 그 날, 잊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마음에 새겼었다.

유일한 한국인. 90프로는 백인이었고. 동양인은 학교 전체에 5명도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 표현하고자 했고 가만히 입 다물고 살 수 없었다. 내 목소리를 드높이지 않으면 아무도 듣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니까. 착하고 웃기만 하는 동양인이 되기는 싫었다. 가만히 있지 않기. 길거리에서, 혹은 파티에서는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그저 멍청한 놈이 지껄이는 말은 무시하면 됐고 욕으로 받아치면 됐다. 뭐 내가 언제는 고분고분한 사람이었던가. 칵 퉤.



그러나 학교에서는 달랐다. 문제점들이 가득했다. 시스템도. 교수도. 수업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했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누구에게 말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권력에 복종하고 침묵으로 방관하는 그들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강약약강이 되고 싶지 않았다. 매일같이 난 가시를 품고 살았다. 언제든지 찌를 준비를 하며. 여기서 난 잃을 게 없었다.



불편함을 표현했다. 시작부터 다짐했던 말이었다. 닥치고 있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니까. 그 과정이 편하지는 않았다. 너무 불편했고 답답했고 힘들기도 했다. 심장이 떨리고 손이 떨렸던 그날도 그 자리에 앉아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이 길을 가지 않으면 또다시 나를 내버려 두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나는 이런 경험을 하고 이런 상황을 겪었지만 다른 사람은 이걸 겪지 않기를 이런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기를 바랐다.



물론 일부 교수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대놓고 조롱하기도 했고, 무시하기도 했다. 내가 말한다고, 불만을 이야기한다고, 문제점을 꼬집는다고 당장 변할 거라고 믿을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다. 그래도 이전 같지는 않을 테니까. 누군가는 문제라는 것을 인식할 테니까.



불편함을 짓밟는 방법 - 노골적인 교수의 무시

매주 다른 친구들은 다른 언어 수업을 들을 때, 우리 6명은 프랑스어 수업을 들어야 했다. 초반에 미국인 교수는 우리에게 "프랑스어 못 알아듣겠으면 꼭 다시 물어보라고 누구든 친절하게 대답해줄 거야"라는 말을 했다. 한 중국인 친구가 말했다.


"대답 안 해주던데..."


"응? 무슨 일이야?"


"그게 내가 자꾸 못 알아들으니까 다시 설명해달라고 하면, 한숨 쉬면서 아 됐어 별거 아니야 이래. 그러고 다시 말을 안 해."



착하고 잘 웃고 부끄러움도 많고 소심한 친구였다. 화가 났다. 이 놈들이 지금 착해 보이고 소심하니까 개무시하는 거라고 느꼈다. 성격이 더러우면 아무도 건들지 않으니까. 물론 그런 기미가 보이는 애들은 상대하지도 않았고 개소리는 무시했다. 착하게 굴지 않았다. 그 날 이후 "Elle est méchante(얘 못됐어)" 소리를 들으며, 못되게 살기로 했다.



매주 그 교수는 물었다. 이번 주는 어땠냐고 어떻게 지내고 있냐고. 잘 지내지 않는다고 이런저런 문제점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외국인 담당 교수였기에. 프랑스어권 친구들이 아닌 외국인은 10명도 채 되지 않았기에 체계적인 시스템이 잡혀있지 않았다. 소수니까. 그렇기에 더 소리높이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내가 이 학교에서 느낀 것 들 경험들에 대해 수업 시간에 이야기했다.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말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물어봤잖아. 한 학기가 지나고, 조금씩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물론 이 전에도 내가 하는 이야기가 듣기 싫다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지만 노골적으로 변한 것은 2학기 때이다.



7명. 한국. 중국. 독일. 이탈리아. 폴란드(영국 거주). 스페인. 미국(교수). 모두 각기 다른 나라에서 각기 다른 배경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매 수업마다 그 배경이 잘 드러났고, 그로 인해 재밌기도 했고 배운 것들도 많았다. 교수는 매번 "프랑스와 비교하면 ㅇㅇ아, 너네 나라는 어때?"라는 질문을 했다. 정치, 문화 등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한 명 한 명 대답을 이어갔다.



그 날 나는 끝에 앉았고. 내 앞 친구의 대답들을 들으며 대답을 고민하며 나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기를 기다렸다. 아니, 질문은 없었다. 교수는 내 차례가 되자 화제를 돌렸고. 뭐지? 왜 난 안 물어보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명 한 명 꼬집어서 질문하지 않아도 난 매번 대답하니까 그런가 보다고 합리화했다. 다른 질문들에 내 의견을 피력했다.



그래도 찜찜했다. 친구에게 이 상황을 설명했다.


"음.. 그래? 왜 그렇지? 실수 일 수도 있으니까 다음에 한번 더 두고 보자. 두 번째는 결코 실수가 아닐 테니까."


"그래? 기분 더럽지만 다음 수업 때 다시 봐야겠다."



아 실수였나? 아니. 두 번째는 더 노골적이었다. 난 중간에 앉았다. 이 날은 나를 건너뛰고 질문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웃음이 나온다. 아니 어린애도 아니고 유치하게 이게 뭐하는 짓이야. 이 정도에 기죽을 내가 아니었다. 더 뻔뻔하게 대답했다. 학교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하는 것도 멈추지 않았다. 교수에 대한 문제 제기를 했냐고? 아니 안 했다. 못했다. 어디에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아무도 문제 삼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나도 편하지 않지만 교수가 불편해하는 상황을 계속 이어가는 게 내가 선택한 방안이었다.



화났냐고? 화났다. 속상했냐고? 속상했다. 한편으로 억울하기도 했다. 이 상황을 다 같이 겪으면서 아무 말도 안 하는 친구들이 미웠다. 세상에 문제점이 많다고 외치며 눈 앞의 일에서 발을 빼는 모습이 가증스러웠다. 돌이켜 보면 난 의존하고 있었다. 우린 친구니까. 친구가 부당한 일을 겪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라며. 그들은 나를 보호할 의무도 내 편에 서야 할 이유도 없었다. 또 배웠다. 내 인생 내가 지켜야 한다고. 아무도 날 대신해 주지 않고, 보호해 주지 않는다고. 속상했을 2018년의 나의 어깨를 지금의 내가 품어본다.



[프랑스 척척석사 생존기]

https://brunch.co.kr/magazine/chuckchuck






매거진의 이전글 [프랑스 척척석사 생존기] 두려움을 마주하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