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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JO 지나친 조각들 Apr 16. 2020

왜? 네가 백인이 아니라서 그래?

[프랑스 척척석사 생존기] 불편합니다 (2)

인상이 찌푸려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니터를 보며 문제를 푸느라 바빴다. 뭐지? 난 기분이 이렇게 나쁜데? 아무렇지 않나? 내가 잘못되었나? 아닌데 이건 분명히 잘못된 건데.

생존분석 TP 시간 (Travaux Pratiques으로 실습시간을 일컫는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예시를 보고 문제 풀이를 하고 있었다. 이론으로 배운 기존 모델을 실제 데이터에 어떻게 적용하는 지를 배우는 시간이었다. 이 날 수업은 주어진 코드를 이름만 바꿔 대입하고 그 결과를 어떻게 해석하는 지를 다뤘다.


< 문제 3 : 다음은 실험 자료는 임신한 여성에 대한 치료 여부이다. 이 여성이 치료를 그만둘지 계속해 나갈지, 며칠 동안 계속할 것인지를 확률적으로 판단해보는 것이다. 주어진 자료는 다음과 같다>

1. 질병 여부

2. 혈압

...

5. 인종 : (1) 백인 (2) 흑인 (3) 기타


기타? 인종? 진심인가? 인상이 찌푸려졌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모니터를 바라보며 변수 이름을 수정하고 있는 파트너를 쳐다봤다.


"야 이거 미친 거 아니냐? 인종? 백인 흑인 기타라고? "

"아 어 그렇네"

"아 너무 화나 미쳤네. 안 되겠다 교수한테 말해야지."

"하하하 야 근데 있잖아 진짜 너 왜 화난 거야? 네가 1에 속하지 않아서 그래?"


네가 백인에 속하지 않아서 그래?

오 마이 갓. 펀치로 뒤통수를 후려 맞는 기분이었다. 옆에서 불난 집에 기름을 쏟아붓고 있었다. 참고로 그는 독일 백인 남성이며,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고 옳고 그름을 지적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뭐 자신이 관련된 문제에는. 장난인가 싶어 그의 눈을 마주했다. 아니었다. 진심으로 물어본 말이었다. 장난이어도 재미도 이유도 없는데, 진짜 이해하지 못한 눈이 나를 쳐다봤다. 말문이 막혔다. 혈압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숨을 내뱉었다. 그 표정이, 그 눈이 위에서 짓누르는 기분이 들었다. 진짜 왜 화났는지 궁금했다기보다 저 "네가 1에 속하지 않아서 그래?"라는 덧붙인 말에서 오만함, 백인이 우월하다는 그의 생각이 느껴졌기에. 상상을 뛰어넘었다. 나의 뇌로는 전혀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말이었다.


"너 진심이야? 닥쳐"

"하하하하 응? 왜? 문제 풀자. 너 화 많이 났구나."


끓어오르는 감정을 삼키고 시계를 봤다. 아직 20분이 남았다. 어디로 가야 하나 누구에게 먼저 이 문제를 이야기해야 하나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용납할 수 없었다. 무작정 교수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내 입에서 어떤 말이 쏟아져 나올지 몰랐기에. 다듬고 삼켜야 했다. 정말 이게 필요한 변수인가? 아니. 필요 없는 변수다. 이 수업의 목적은 무엇인가? 예시를 보고 주어진 모델을 적용하며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 지를 배우는 수업이다.



학생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어떤 식으로 도출되어야 하는지를 말하는 TP 담당 교수가 보였다. 아니다. 이 사람이 아니다. TP 수업은 매 년 수정되지 않고 반복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수업을 담당하는 교수가 아닌 박사생들이 주어진 자료로 수업을 이끄는 것이었기에 그들은 잘못이 없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하는 존재들이었으니까. 그러면 누구에게 말을 해야 하나. 교수 오피스에 직접 들이닥쳐야 하나. 지금 내 상태로는 프랑스어로 풀어내기 쉽지 않겠다.


그러면 우선 외국인 담당 교수를 찾아가자. 영어로 이야기하는데 지장이 없으니까. 지난 학기에 들었던 차별에 대한 영어 수업을 진행한 사람이니까. 문제가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말할 상대가 필요하면 오라고 자기 오피스는 열려있다고 항상 말하는 사람이니까.



17시. 땡. 가방을 챙겨 나왔다. 복도에서 어제도 프로젝트를 같이 한 친구를 마주쳤다. 너 마지막 예시 봤냐고, 너무 화난다고 교수한테 지금 말하러 갈 것이라고 했다. 눈이 동그래지더니 내 앞을 가로막았다.


"나 너무 화나. 교수한테 가야겠어."

"아냐 근데 있잖아. INSEE(통계청) 사람들은 공부도 많이 한 사람들이고 똑똑한 사람들이야."

"그래서? 그거랑 상관없어. 그게 정당한 이유가 되지 않아"


그 사람들은 공부도 많이 했고, 똑똑한 사람들이야.

또다시 훅이 들어왔다. 문제는 그게 아니잖아. 공부를 많이 했다고? 똑똑하다고? 그거랑 무슨 상관인데. 그게 어떻게 잘못된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건데. 그는 프랑스 백인 남성이었다. 이제 갓 프레빠라는 학교를 지나 성적이 인생을 좌지우지하고 개인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회에서 살아온 사람이었다. 기껏 가라앉힌 소용돌이에 다시 불이 붙었다. 이 상태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우선 건물 밖으로 나왔다.


"J 왜 그래? 너 화나 보여."

"어 나 개빡쳤어. 마지막 문제 봤어? 인종? 미친 거 아냐?"

"어 야 나도 봤어. 그거 알아? 나도 기타야. 기타 등등"


모로코 여성들. 어떻게 됐는지 알려달라는 이야기를 뒤로 한 채 외국인 담당 교수의 오피스로 향했다.


무슨 생각이었냐고? 이 일은 잘못되었고, 지금 이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내년에도 후년에도 같은 예시가 반복될 것이라는 것. 지금까지 이 예시를 사용한 것은 아무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 그렇기에 무조건 교수 오피스로 찾아가거나 이메일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랑스 척척석사 생존기]

https://brunch.co.kr/magazine/chuckchuck


* 이전 글

https://brunch.co.kr/@jijo/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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