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척척석사 생존기] 불편합니다 (3)
똑똑. 분노를 가라앉히고 숨을 가다듬었다. "항상 열려있다"는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교수가 매번 하는 말이다.
"문제가 있어. 그리고 난 이게 인종차별이라고 생각해."
"아 그래? 무슨 일인데?"
결론부터 말했다. 두괄식 표현.
"아니 프랑스는 인종을 묻는 것도 금지되어 있잖아 근데 백인, 흑인, 기타라고?"
"아 그렇지 프랑스는. 그러면 이건 아마 미국 실험을 가져온 예시일 거야."
"어디에도 출처가 나와있지 않고 실제 자료에서 기반했는지, 아니면 만들어 낸 것인지 나와있지 않아.
이 변수는 결코 중요한 게 아니고. 난 담당 교수에게 이메일을 보내겠어."
우선 나는 이 문제에 굉장히 예민한 사람인데,
그거 인종 차별 아니야.
네가 잘못 생각한 거야.
응? 뭐라고? 예민한 사람? 교수가 내뱉은 말은 놀라웠지만 결코 놀랍지 않았다. 미국 백인 남성이 자신을 인종차별에 예민한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문제를 제기한 동양인에게 네가 잘못 생각한 거라는 이 모습. 익숙하지 않은가. 어느 한 단어 주옥같은 말뿐이다. 말하는 주체와 내용을 담은 표현들 그리고 듣는 객체까지 완벽한 조합이다. (참고로 프랑스는 어떠한 실험에도 인종을 기재할 수 없으며 설문지를 통해 인종을 묻는 게 금지되어 있다.)
"물론 네가 이메일을 보낸다면 말릴 수 없겠지만, 이건 인종차별이 아니라 실험이고.
너무 공격적으로 생각하지 마"
"난 동의하지 않아. 이메일을 보내겠어. 알겠어. 고마워 안녕."
속이 탔다. 왜 갔나 싶었다. 나의 뇌는 저들의 세계를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저 문을 두드렸을까. 문을 항상 열려있다. 일부에게는. 난 무엇을 기대한 것일까. "아 그래 문제가 있구나. 이 예시는 고쳐야 하는 게 맞겠다. 담당 교수에게 메일을 보내지 않을래?"라는 말이 그 공간에서 나올 거라고 생각했나.
열린 문을 뒤로하고 걸어 나와 학교 앞 벤치에 앉았다. 다리의 힘이 풀리고 한숨이 나왔다. 난 무엇을 기대한 것일까. 왜 이렇게 나를 막으려는 게 많지? 숨 쉬듯이 가스 라이팅을 하는 사람들. 이 예시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게 뭐라고 세명이나 되는 백인 남성들이 내 입을 막으려 했을까. 1이 아닌 3에 속하는 너는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라는 느낌을 받았다. 자기 일도 아닌데 왜 저렇게 나서서 온몸으로 막을까. 그들은 내가 아닌 교수에 자신을 투영해서 생각했기에. 자신에 대한 도전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이 날 배웠다. 무슨 일이 생기면 담당 교수와 학과장에게 바로 표현해야 한다고. 직접 전달되지 않으면 나의 주장은 왜곡되고 중간에서 "내가" 걸러진다고. 더 이상은 질문할 여지도 없었다. 지는 태양이 수놓은 붉은 하늘을 마주하며 보금자리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내가 갖고 있던 기대도 함께 사라졌다.
교수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공격적이지 않고 굉장히 공손하게. 나는 이 예시를 보면서 불편했다고. 무슨 의도로 이 변수를 선택했으며 혹여나 이 변수가 꼭 포함되어야 하고 중요하다면 이유를 설명해달라고. 인종차별이라는 말은 뺐다. 백인 남성들은 인종차별이라는 단어만 들으면, 보면 그게 무슨 악마인 것 마냥 화를 내는 걸 봤기에.
안녕하세요 교수님,
저는 프랑스인이 아니며, 프랑스인들이 교수님께 어떤 형식으로 이메일을 보내는지 잘 모릅니다. 우선 흥미로운 생존 분석 수업을 이끌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TP시간에 매우 놀랐고, 불편했던 점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어떠한 설명이 없었기 때문에 어떤 의도로 이 예시를 선택하였는지 알지 못하지만, 전 굉장히 당황스러웠습니다.
3번 문항인 "예시"에는 "인종 : 엄마의 인종 (1=백인, 2=흑인, 3=기타)"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전 인종이 백인, 흑인, 기타로 정의된 것을 보며 불편하였습니다. 만일 이게 정말 필요한 변수라면 어디서 가져왔는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제가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전 당신이 제 교수이기 때문에, 이 일을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이라 생각하여 이 편지를 씁니다.
무엇인가를 바라고 쓴 이메일은 아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고, 내가 참을 수가 없었다. 교수가 답장을 하든 그저 쓰레기통에 박히든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세명의 남성들로 인해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다음 날 교수에게 답장이 왔다. 그것도 학과장, 외국인 담당 교수에게 CC를 걸어서.
2019년 4월 10일 교수의 답장
편지 고맙습니다. 제 수업이 학생의 기대를 충족했다니 기쁘군요.
"예시"에 대해서 이런 방식으로 만든 게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해당 문건은 이전에 사용되던 방식 그대로 썼고 이는 R 패키지 예시문에 들어 있는 방식을 참조해서 작성한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널리 쓰인 책에도 같은 방식으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The same type of variable is defined in the worldwide used textbook of Klein & Moeschberger 2003 (e.g. page 14, section 1.13))
물론 "인종"이 특정 연구의 밖에서 바라보면 부적절하고, 정의된 방식이 문제라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통계학에서는 공적인 자리 나 사회에서 통용되지 않는 용어가 변수나 양식을 정의하는 법으로 드물지 않게 사용됩니다. 비록 우리의 목적은 과학을 쫓는 것이지만, 우리는 나아가야 하고 우리 분야에서 사용하는 단어들을 주의 깊게 선택해야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줘서 고맙고, 주의해서 내년에는 해당 문서를 바꾸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이 "예시"가 불편하게 했다면 유감입니다. 저도 제 동료들도 그럴 의도가 없었음을 밝힙니다.
놀랐다. 내년에는 바꾼다니. 다행이다. 바뀌는 게 있다.
과학이라는 분야는 우리 삶에서, 우리 사회에서 면제권을 갖기 쉽다. 과학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지고 용서되는 일이 많지만, 그래서는 안된다. 그 과학은 우리의 삶을 다루고 있고,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에 더 용어 선택에 신중해야 하고 문제점이 있으면 고쳐나가야 한다. 그게 과학이 가진 철학이기에.
물론 이 교수 입장에서는 굳이 무시할 이유도 없고 그저 문서만 바꾸면 되는 쉬운 일이기 때문에 이렇게 대처했을 것이다. 난 이 날 잊지 못할 상황을 경험했고, 여러 시각을 보았다. 누군가 불편함을 느끼면 네가 잘못된 게 아니라 문제가 있다는 걸 인식해야 한다고. 불편해도 받아들여야 하고. 불편하면 말해야 한다는 걸. 다시 마음에 새겼다.
가만히 있지 않겠다.
[프랑스 척척석사 생존기]
https://brunch.co.kr/magazine/chuckchuck
*이전 글 :
https://brunch.co.kr/@jijo/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