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가까이 게임을 해오며 느낀 게임 불감증에 대한 이야기
필자가 게임을 접한 건 5살 때부터다. 아버지가 사주신 '재믹스' 게임기를 통해 처음 게임을 해봤고 그 뒤로는 게임에 빠져 무서운 형들이 가득한 오락실을 매일 방문했다. 그리고 패미컴부터 메가 드라이브, 슈퍼 패미콤, 세가 세턴, 게임 보이, 플레이스테이션 시리즈, 드림 캐스트, Xbox360 등 현재 세대까지 거의 대부분의 콘솔을 구입해 소장하고 즐겼다.
게임을 즐긴 후에 공략을 하거나 소감을 남기는 일을 어릴 때부터 좋아했다. PC통신 시절부터 인터넷 초창기 시절 필자는 게임 관련 글을 써서 올리고 '다운로드 수' 또는 '조회수'를 보며 즐거워했다. 그렇게 시작된 게임 관련 일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아직도 게임 관련 일을 하는 건 이렇게 글 쓰는 것처럼 재미있다.
하지만 이런 필자에게도 시련이 몇 번 왔었다. 바로 게임 불감증이다. 아마 게임을 많이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한 번쯤은 겪게 되는 게임 불감증은 한 번 걸리면 정말 빠져나오기 어려운 중병이다. 특히 게임 업계에 종사한 필자의 경우는 소감이나 평가, 또는 업무의 상황에서 불편함이 생기기 때문에 매우 괴로웠다.
게임 불감증은 쉽게 이야기하면 게임으로 느낄 수 있는 만족감이나 성취감, 또는 재미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증상이다. 일본 위키나 여러 커뮤니키 사이트를 보면 플레이스테이션과 세가 세턴 시대에 처음 증상이 나타났다고 하는데 아마 시각적 격차가 커지고 게임에 대한 경험이 쌓이면서 이에 대한 차이점을 스스로 인식해 더 크고 대단한 자극을 바라게 만든 것 때문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도 있겠지만 게임 자체를 아주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환경 문제도 있다. 모바일부터 무료로 즐길 수 있는 게임이 매일 쏟아지고, 1천 원부터 5천 원 정도의 저렴한 가격의 세일 게임도 쉽게 접할 수 있다. 매달 30~50개, 많게는 100개 가까운 게임을 접할 수 있는 환경에 있으니 웬만해선 눈길을 주기 어려울 것이다.
여기에 장르화로 고착화된 게임 시장은 시각적인 자극만 다를 뿐 비슷한 수준을 보여준다. 특히 모바일 게임은 정말 편의점처럼 외형만 조금 다르지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방향이 같아 보인다. 예전에 시장을 돌아다니던 재미가 편의점에서 느끼긴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이런 격차가 반복되다 보면 어느새 게임이 주는 감흥 자체가 사라진다. 그냥 게임 자체가 하기 싫어진다. 이게 즉 게임 불감증이다. 이렇게 시작된 불감증은 정말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 정도로 힘들게 한다. 무수한 AA급 게임도 별 관심이 없어지고 도트나 모바일 게임을 보면 유치하고 수준 낮다고 판단해 버린다.
여기부턴 개인적인 생각 위주이므로 가볍게 읽고 참고 정도만 하는 것이 좋다.
필자가 게임 불감증에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판단했던 것은 '그냥 생각하지 말자'였다. 게임이 재미있어야 하고, 더 좋은 게임이 있었으면 좋겠다, 왜 이 게임이 별로 일까 등의 생각 자체는 하지 않았다. 그냥 업무적으로 게임이 있으면 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버려뒀다. 게임을 구매하는 것도 멈췄다.
이게 어렵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더 좋은, 더 나은 무언가를 찾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면 게임 불감증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면서 게임 자체에 대해 평가하는 것도 최소화했다. 예전에 게임을 하면 '이런 부분이 문제네' '뭐가 별로네' 등의 말을 습관적으로 했다. 직업적인 것도 있지만 어릴 때부터의 오랜 버릇 중 하나였다.
이런 생각이 가득하니 게임이 게임으로 보일 리가 없다. 하나의 일 또는 뭔가 평가하고 분석해야 하는 존재처럼 보였던 것이다. 커뮤니티 등에 가보면 이런 분들이 상당히 많다. 2시간 소감, 엔딩 보고 소감, 이 게임의 장단점 등 게임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 평가하고 결과를 내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누구나 좋은 물건, 더 맛있는 음식 등을 찾지만 결국 내 집, 내가 쓰던 물건, 집밥이 맛있듯 편한 것이 최고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필자는 PC 게임으로 게임을 즐길 때는 옵션은 '평균' 또는 '중간' 정도로 맞춰서 한다. 아니면 그냥 사양 검사 기능을 이용해 자동으로 설정되는 값으로 게임을 즐긴다.
복잡하게 더 나은 걸 찾는 습관을 버리니깐 게임이 편해졌다. 남들보다 더 대단한 그래픽을 보지 않아도 지금 당장 편하고 부드럽게 흘러가는 게임의 모습에 자연스럽게 게임 불감증이 해소됐다.
또 다른 방법은 컷 신을 스킵하지 않는 것이다. 게임 평가 중에 '이 게임은 컷 신, 동영상 스킵이 없다'라는 내용을 단점으로 지적하는 것이 많은데, 개인 적으로 매우 동의했다. 바쁘고 당장 어떤 놈 없애야 할지 뻔히 아는데 시답지 않은 캐릭터들의 대화라니, 당연히 스킵했고 그렇지 못한 게임은 심지어 꺼버렸다.
물론 스킵 기능은 유저의 편의를 위해 무조건 필요하다. 이걸 안 넣는 -특히 일본 게임들- 게임들을 보면 화가 날 정도다. 하지만 이런 과정 속에서 게임 불감증이 심해진다면 믿을 수 있을까. 게임이나 모든 엔터테인먼트, 미디어 상품들은 결과를 알면 재미가 반감되거나 없어진다.
근데 스스로가 어차피,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컷 신을 넘겨버리면 스스로가 자신에게 스포일러를 한 셈이나 다름이 없다. 여기에 게임의 중요한 근간이 되는 '이야기' 자체를 포기하고 적을 없애거나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데 주력하는 상황은 다채로운 게임을 '단순하게' 즐기는 행위가 되어 버린다.
모든 게임이 비슷하다, 천편 일륜적이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습관들이 없는지 보는 것이 좋다. 게임은 천천히 즐길수록 재미있다. 필자는 모바일 게임을 해도 초반에 달성해야 할 조건들이 있으면 이것저것 다 찾고 그 후에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간다. 굳이 안 찾아도 되는 걸 다 찾아 별 3개를 받으면 매우 기분이 좋다.
급하게 음식을 먹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먹으면 음식 맛이나 알겠냐?"라고 하듯 게임도 컷 신들을 죄다 스킵하고 빠르게 엔딩을 보려고 또는 만렙을 달성하기 위해 달리는 사람들은 그만큼 좋은 게임, 풍성하고 다채로운 게임을 자기식의 단순화시킨 형태로 즐기고 있다는 의미다. 모든 게임이 같은데 재미가 있겠는가?
또 다른 방법은 어떤 게임이든 작은 소정의 대가를 지급하고 즐기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부분 유료' 게임을 좋게 보지 않는다. 과금을 유도하는 방식 자체가 게임의 질을 하락시키고 게임 방식을 일원화시키기 때문이다. 무료라는 자체가 게임에 대한 흥미를 버리게 만들고 쉽게 포기하게 한다.
최근에 에픽스토어에서 줄기차게 무료 게임을 뿌려왔다. 필자도 당연히 다 받았다. 하지만 그중에서 플레이 한 건 10%도 안된다. 그나마도 30분 이상도 못 즐겼다. 내가 직접 구매하지 않은 게임이고 스스로도 '라이브러리'나 채워야지라는 생각이었다. 오히려 언제 무료 뜨나 기다렸다가 냉큼 받는 과정을 즐겼다.
콘텐츠는 소비형이다. 내가 돈을 얼마를 주고 그걸 산다는 건 그만큼의 가치를 인정했다는 의미다. 비싼 돈을 주고 산 옷이면 그만큼 더 신경 써서 입듯 게임 역시 값어치를 인정해야 즐길 수 있다. 정가를 주고 구매했지만 실망스러운 게임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무료 게임의 평가보다 나쁘게 나오지 않는다.
실제로 구글플레이 게임 평점들을 보면 무과금 유저라고 당당히 말하면서 '이 게임 겁나 구림'이라고 쓰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과금을 하든 안 하든 무료로 제공되는 게임인데 아주 살벌하고 신랄하게 비평한다. 자신의 시간을 빼앗긴 것에 대한 분노일까? 아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게임 즐기는 방식이 잘못된 거다.
필자는 모바일 게임을 해도 최소 수준의 과금은 무조건 해본다. 그리고 만족스러우면 조금 더 과금을 한다. 하지만 부분 유료 게임 하나에 절대로 정가(예를 들어 69,800원) 수준만큼은 쓰지 않는다. 그 이상을 쓸 정도 게임도 보지 못했고 그만큼 써도 어차피 최고 수준의 랭커에 들 수 없다.
이렇게 자신이 게임에 대해 쓸 기본적 수준을 정해놓고 모바일이든, 온라인이든, PC 패키지든, 콘솔이든 딱 그 정도만 한 게임에 쓴다고 생각하면 생각보다 게임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나 어색함이 줄어든다. 콘텐츠의 가치를 인정하면 그 콘텐츠의 진정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은 게임에 스트레스를 받지 말라는 것이다. BJ들이나 유튜버 등을 보면 극악의 난이도를 끙끙거리며 깨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걸 따라 매우 어렵게 게임을 즐기는 분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분들은 직업 특성상 하는 일이다. 게임을 즐기는 이유는 현실 속 스트레스를 풀기 위함이지 쌓기 위함이 아니다.
현실에서 도피해 거대한 판타지 세상에 들어왔으면 쉬운 녀석들부터 차근차근 신나게 날려주고 '난이도'를 쉬움으로 바꿔 보스 따위로 쉽게 박살 내버려야 한다. 굳이 현실에서 날 괴롭히는 '박 부장'이나 아부 떠는 '최대리' 같은 인간들 또는 자신을 괴롭히는 '양아치' 들한테 받는 스트레스를 왜 게임에서 받는가?
게임은 콘텐츠이자 간단한 심리적 허들이다. 그 게임 속에 몰입해 성취감을 느끼는 건 극악의 난이도나 '만렙' 같은 장치가 아니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작은 에피소드를 완료하는 것부터다. 하나의 과정 자체에서 스트레스가 풀리고 만족감을 느꼈다면 그쯤에서 게임을 멈춰도 좋다. 어차피 게임은 도망가지 않으니깐.
그딴 건 없다. 게임 불감증을 치료하는 데는 게임만 한 것도 없지만 더 자극적이고 더 충동적인 게임을 즐기는 건 내일 올 게임 불감증을 며칠 뒤로 미루는 정도다. 자신의 게임 습관 자체가 고쳐지지 않으면 게임 불감증은 평생 게이머를 괴롭힐 것이다.
대신 위에서 언급한 내용들을 추려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게임을 즐기는데 굳이 많은 생각을 하지 말자. 게임은 그냥 하는 거다.
-평가하지 말자. 별로든 좋든 그냥 즐기면 되고 재미없으면 포기하면 된다.
-컷 신이나 게임 내 이야기 등을 스킵하는 버릇을 버리자. 스스로가 게임을 스포일러 하면 재미가 없다.
-게임의 가치를 인정하고 작은 돈이든 꼭 구매하자. 가치를 인정해야 진정한 재미도 보인다.
-무리한 과금은 오히려 독이다. 게임 플랫폼에 맞춰 소비 수준을 정해놓자.
-남들이 하니깐 등의 남의 기준에 맞추지 말고 자신만의 플레이를 인정하고 존중하자.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하는 것. 눈치 보지 말고 못하면 못하는 데로 잘하면 잘하는 데로 즐기자.
-재미의 수준에 격차를 두지 말자. 물고기를 잡아도 드래곤을 잡아도 '그냥' 잡은 거다.
조금이나마 게임 불감증에 힘든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사실 최근까지 계속 글을 쓰지 못했던 것도 불감증 원인이 컸다. 게임이 재미가 없는데 뭘 평가할까. 하지만 게임 불감증을 내려놓은 지금 필자는 매우 편하고 즐겁다. 소소한 게임들을 찾아 차곡차곡 즐기고 그에 맞는 소감을 남길 수 있게 됐다.
많은 분들이 게임 불감증에서 벗어나 곧 쏟아질 무수한 명작들, 그리고 심연의 진주처럼 숨어있는 클래식한 명작들을 사심 없이 즐길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