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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몽연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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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겜노인 Nov 23. 2020

틈새

[몽연담] 두 번째 꿈

A가 눈을 떴을 때 주변에는 칠흑 같은 어둠만 있었다. 그것도 평소와 다른, 앞이 아예 보이지 않을 정도의 어둠. 살면서 이렇게 어두운 관경을 본 적이 있었을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난 분명히 어제 집에 들어와서 잠들었는데..."


불안함에 A는 자신이 누워있던 공간을 더듬거렸다. 이불, 침대, 그리고 베개가 느껴졌다. 그래도 낯선 느낌이 사라지지 않자 그는 슬그머니 이불의 냄새를 맡았다. 하지만 내심 기대했던 자신의 삶 내음은 나지 않았다.


"이건 내 이불이 아닌데.. 여긴 어디지?"


몸을 슬쩍 일으켰다. 그리고 머리 쪽 벽을 천천히 더듬었다. A는  평소보다 부쩍 어두운 이 공간에서 낯섦과 두려움이 느껴졌다. 팔 쪽에는 슬그머니 닭살이 돋아났다. 어제 상황을 곱씹어보기로 했다.


"그러니깐, 어제.."


회사가 끝난 후 A는 평소처럼 지하철을 타고 집 근처로 왔다. 집에 들어가는 길에 편의점이 보여 맥주를 사 먹을까 고민하고 있던 찰나 동네 후배가 생각나 전화를 걸었다. 그 후배는 지하철 3 정거장쯤 살고 있다.


몇 번의 통화 연결음이 울린 후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C였다. C는 대학교 후배로 알고 지내지만 벌써 10년째다. 모나지도 않는 성격에 술을 좋아하는 성격에 두루두루 사랑받던 친구였다.


"선배, 웬일이에요? 이 시간대 전화한 것 보니 술 한잔 땡기나 보네요?"

"아, 미안 미안 바쁘니?'


평소 습관처럼 사과부터 하는 A. 오랜 직장 생활, 영업직으로 근무하며 이런 상황에선 사과부터 하는 버릇이 생겼다. A는 입버릇처럼 나온 그 말에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이고 무슨 사과까지.. 괜찮습니다! 선배 저 지금 회사 끝나서.. 어디신데요?"


A는 멋쩍은 듯 손가락으로 오른쪽 볼을 긁었다. C에겐 집 근처 평소 자주 가던 술집에서 보자고 했다. C에겐 익숙한 곳이었다. A는 천천히 술집으로 향했다.


평소와 같은 길이었다.  다만 이른 저녁임에도 평소보다 한적한 골목 풍경은 조금 의아했다. A의 손목의 초침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고 차곡차곡 시간을 쌓아갔다.


그때 A의 눈에 띈 공간이 있었다. 골목 사이에 있던 작은 샛길 같은 거였다. 3년 전 이직과 함께 이곳으로 이직 온 후 매일 걷던 이 길에서 처음 만난 낯설음이었다.


그 사이의 길은 초저녁의 어둠보다 훨씬 어두운 모습이었다. 샛길 사이 그 어떠한 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A는 그 기묘한 낯선 어둠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리고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궁금증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천천히 그곳으로 걸어가는 A. 골목의 가로등이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가고 있었다. 한걸음 한걸음. A는 어느새 샛길 바로 앞까지 걸어왔다. 여전히 그곳은 오랜 시간 잊고 지낸 어릴 적 기억처럼 흐릿했다.


"선배!"


A가 놀라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C가 있었다. 셔츠 차림의 그는 평소처럼 단정한 모습이었다. 다만 단추 푼 와이셔츠와 구겨 넣듯 넣었지만 살짝 손 내민 가방 속 넥타이가 그의 퇴근을 증명하듯 눈에 띄었다.


"아, C야. 벌써 온 거야? 빠르네.."

"흐흐 선배 기다릴까 봐 택시 타고 왔죠. 근데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요?"

"응? 아냐 아냐 그냥 여기 샛길이 있길래.."

"내가 여기까지 왔으니 술은 선배가 사죠?"


C는 싱글벙글 웃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A는 술집을 향해 힘찬 걸음을 내딛는 C를 보고 웃음이 터져버렸다. 그리고 어느새 샛길의 까만 어둠에 대해 잊어버렸다.


다시 어두운 공간. A는 불현듯 어제 보았던 샛길이 생각났다. 하지만 C와 술집에 들어가서 평소처럼 술을 마신 이후가 잘 떠오르지 않았다. 꼭 블랙아웃처럼 말이다.


"그래서 여기가 어디지?"


A는 다시 한번 눈에 힘을 주고 주변을 바라봤다. 이 정도 시간이면 적응돼 주변이 보일만도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더듬어 침대 주변으로 몸을 옮겼다. 침대 아래쪽으로 슬쩍 다리를 내렸다.


평소라면 '지각이다!'이라면서 점프하듯 내려오는 그 공간이 지금은 절벽 위에 선 사람처럼 두려웠다. 덕분에 침대 아래가 보이지 않은 낭떠러지 마냥 느껴졌다.


"앗 차거!"


A는 깜짝 놀라 다리를 침대 위로 황급히 올렸다. 얼음장 같은 차가움. 평소 느껴보지 못한 차가움에 그는 도망치는 아이처럼 침대 중간으로 몸을 당겼다.


커피에 얼음을 타 먹기 좋아했던 A가 냉동실에서 느낀 차가움이나 매일 한 번은 가는 편의점 내 아이스크림 냉장고의 차가움, 살얼음이 낀 맥주를 내 볼에 대던 여자 친구 'I'가 안겨준 차가움과는 다른 그런 차가움이었다.


"I.. I는 지금 뭐 하고 있을까?"


A와 I가 헤어진 건 한 달 전이었다. A는 -모 패션 잡지에 있던 이별의 아픔에 대한 내용과 다르게- 헤어진 이후 지금까지 무덤덤했다. 오랜 시간 사귀었지만 헤어진 이후에는 몇 분 후 곧 남이 됐다.


"뜬금없네.. I 생각이라니.. 그만큼 싫어했는데.."


고개를 가볍게 흔든 A는 다시 현재의 상황에 집중하기로 했다. 칡흑 같은 어둠, 그리고 얼음장같이 차가운 바닥, 그리고 침대-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지만-에 있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을지 말이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어두운 곳에서 계속 있다 보니 시간이 가는 건지 아니면 그대로 멈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어서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어제 혹시 다른 일이 있었나?"


A는 어제 일을 다시 떠올려봤다. C와 단골 술집에서 술을 한잔 했고 C의 회사 직장 동료인 여자분이 동석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두 명이서 어느덧 흥에 취해 소주 3병을 막 비울 때였다.


"주임님! 여기 사세요?"

"누.. 누구? 엇! L주임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A는 이제는 식어버린 찌개 한 숟갈을 뜨다 눈만 치켜뜬 채 C의 옆에 섰던 여성의 얼굴을 봤다. 이내 정색하듯 숟가락을 내려놓고 헛기침을 했다. C가 슬쩍 A를 쳐다봤다. 


"선배, 저희 회사에서 같이 근무하는 L주임님이세요"

"어머 말씀 많이 들었어요. 안녕하세요. L입니다."

"아, 넵 반갑습니다"


칙칙했던 술자리가 급 화사해졌다. L은 친구랑 저녁을 먹고 집으로 가던 길에 우연히 C의 모습이 보여 술집에 들어오게 됐다고 말했다. A는 두 손으로 공손히 소주 한잔을 L에게 건넸다. 


"건배!"


L은 시원시원했다. 그녀는 시종일관 대화를 리드했고 그렇게 A와 C는 그곳에서 더 많은 술과 안주를 시켜 먹게 됐다. 아까부터 오른 취기는 어느새 11시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맞아.. L이 도중에 왔어.."


A는 조금 더 떠오른 어제의 기억에 작은 희망이라도 꺼내려는 듯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L이 오고 나서 우린 어떻게 했을까. 2차를 갔을까. 아니면 그대로 헤어졌을까.


"아.. 도저히 모르겠어.."


A는 머리를 마구 손으로 비볐다. 그때 불현듯 다시 I 생각이 났다. 헤어진 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녀. 그녀는 헤어질 때 자신에게 마구마구 소리를 질렀다. 


그런 상황에서도 A는 전혀 미동도 없었다. 그냥 이 모든 것이 빨리 끝났으면 하는 표정만 지었다. I가 어떤 말을 하는지 잘 기억나지도 않았다. A에겐 지금의 연애가 귀찮고 지겨울 뿐이었다.


문뜩 침대의 끝이 궁금해졌다. 그는 몸을 조심스럽게 옆으로 굴렸다. 침대 밑에 떨어지면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 걱정도 있었지만 그래도 침대 안에 몸이 있다면 별 문제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A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차가움! 아까 그 발에서 느꼈던 차가움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A는 그 공간이 생각보다 작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뭐... 뭐지?"


이겨내지 못할 정도의 차가움은 아니었다. A는 조심스럽게 벽을 더듬어갔다. 생각보다 작은 공간. 침대를 빼면 그야말로 사방이 막혀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불만 켜진다면 아마 '캡슐 호텔' 같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차가움 탓이었을까. 어제 술로 인해 희석됐던 생각이 조금 더 떠올랐다. 1차 술자리는 약 11시 30분경 끝났다. C는 노래방을 가자고 외쳤고 A는 손사래를 쳤다. L은 홍조가 조금 오른 얼굴로 "가요 가요!"라고 했다.


흥겨운 노랫소리와 C의 -끔찍했던- 발라드, 의외로 노래를 잘했던 L주임의 모습들이 조금씩 떠올랐다. 초면인데도 부끄럼 없이 춤도 추고 마구마구 떠들었다. 이렇게 하루의 밤이 지나 새벽으로 넘어갔다.


"선.. 선배~ 전 어휴~ 가겠어요~ 태.. 택시~"


혀가 꼬일 데로 꼬인 C는 애써 택시 승강장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새벽의 공기가 차서 그런지 A의 정신도 조금은 나아지는 기분이었다. L은 C를 향해 손을 흔들어줬다. C는 손을 가볍게 들어준 후 택시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L주임님, 어디로 가세요?"

"아, 저 이쪽 연 근처에서 살아요"


L이 손가락을 가리킨 곳은 A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A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마 술기운에서 그럴 수도 있고 헤어진 후 오는 또 다른 썸에 대한 본능이었을 수도 있다.


"저도 집이 그쪽 방향인데 늦었으니 바래다 드릴게요"

"정말요? 다행이다. 이 동네 늦은 시간이면 너무 컴컴해서 살짝 겁나거든요"


L의 미소가 A에게 전달됐다. 없던 자신감도 솟아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A는 L과 함께 골목으로 들어갔다. 


"맞아.. 별일은 없었지.."


그랬다. 그녀의 집은 큰 오피스텔이었고 주변에는 편의점과 작은 동네 술집들이 여러 불을 켜놓고 있었다. 아마 우범지역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가로등도 아주 많았다. 그녀가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A는 발걸음을 옮겼다.


"띠롱"


문자 메시지다. C였다. 일부로 술 취한 척했다면서 L주임 괜찮지 않냐는 메시지였다. A는 '별소릴.. 자라!'라고 답변했다. 뒤이어 두 번의 문자 메시지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A는 피식 웃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때 자신도 모르게 옆을 쳐다봤다. '틈새' 맞다. 여긴 아까 자신이 홀린 듯 본 그 틈새가 있는 샛길이었다. 그 칡흑 같은 어둠은 여전히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마.. 맞아. 그 틈새 속 어둠"


A는 숨이 멎는 듯한 충격에 빠졌다. 지금의 어둠, 짙은 너무 칡흑처럼 까만 그 어두움. 그 어두움이 지금 온몸을 휘감고 있는 것이었다. A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머리를 굴렸다. 그다음.. 그다음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그래 틈새 속 어둠, 거기서 무.. 무슨 일이 있었지. 제발 기억아! 머리야! 생각 좀 해봐!"


어둠은 아무런 답이 없었다. A는 자신의 외침이 공허한 어둠 속에서 사라져 가는 걸 무기력하게 봐야만 했다. 그리고 조금씩 추워졌다. 안전하다고 생각한 침대도 구석부터 조금씩 얼어갔다.


"사.. 살려줘!!! 누가 나 좀 구해줘!!"


침대를 넘어 다리, 팔, 가슴까지 뻣뻣하게 굳어가는 느낌이 왔다. A는 필사적으로 마지막 상황, 그 틈새 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떠올리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맞아.. I. I가 그곳에 있었지"


A의 얼굴마저 얼어버리고 그 남은 생각마저 굳어버렸다. 그렇게 A의 생각은 끝이 났다.


"헤어진 상황을 납득하지 못하고 격분해 상대방의 눈을 찔러 살해한 30대 여성이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I모씨는 한 달 전 A모씨에게 일방적 이별통보를 받고 나서 그에게 앙심을 품고 스토킹을 해왔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I모씨는 술을 먹고 귀가하던 A모씨를 준비한 얼음송곳 2개로 양쪽 눈을 찔러 살해했습니다. 검찰은..."


"피해자 부모님 되십니까?"

"선생님, 저희 아들.. A가 맞습니까?"

"죄송하지만 직접 신원 확인을 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Y경사는 그들을 영안실로 안내했다. 무거운 공기 때문일지 모르지만 쌀쌀함마저 느껴졌다. Y경사는 그들에게 심호흡하라고 한 후 영안실 냉동고의 문을 당겼다. 스르르, 차가운 공기와 함께 A의 모습이 나왔다.


"아이고 내 새끼.. 아이고!"


영안실 너머로 안타까운 울음소리가 퍼져나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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