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남자, 테스트로테론이 필요해
나이가 들면서 신체는 늙어가고 얼굴도 영락없는 아저씨로 변해가지만 내가 생각하는 나의 정신은 여전히 20대에 머물고 있어서 스스로 중년이라고 부르기는 여전히 민망하다. 아마 환갑이 지나도 이런 정신없는 소리를 하고 있을 것이다. 아직 갱년기라 할만한 질풍노도의 시기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 전조는 눈물과 함께 스르르 왔다. 원래 눈물은 많았는데 살면서 이런 경험 저런 아픔을 겪고 나니 책이나 TV에서 슬픈 내용 비슷한 것만 나와도 나도 모르게 그 상황에 쉽게 몰입된다. 굳이 슬픈 일이 아니라도 아름답거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에도 눈에서 먼저 반응이 왔다. 남편과 아빠의 눈물에 관대한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어서 울고 싶을 때 애써 감추지는 않지만 부쩍 많아진 눈물이 낯설기도 했다.
오로라와 눈물, 이 생경해 보이는 두 단어의 조합을 자꾸 들여다볼수록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오로라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되었을 때 한 번 정도는 오로라 아래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까 했다. 여행 프로그램 같은 데서도 그러는 사람 많이 봤으니까.
유명한 연예인이 아니니 국민이라는 수식어를 달 수는 없겠지만 나는 옐로나이프에서 울보 아재가 되었다. 평소에도 외모와 달리 테스토스테론보다는 에스트로겐이 많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옐로나이프의 자기장이 호르몬 분비에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없지만 테스트로테론은 줄고 에스트로겐은 많아졌다. 검사를 해보진 않았지만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 어떻게 7박 9일을 머무는 동안 네 번씩이나 눈물을 쏙 뺄 수 있었을까. 아, 지금 이 이야기를 하면서도 조금은 쑥스러운 것을 보면 아직 테스트로테론이 어느 정도는 남아 있기는 한 것 같다.
가수 R의 작은 공연이 오로라 빌리지 티피 안에서 열렸다. 당연히 출연자들은 가수가 제일 잘 보이는 앞쪽에 앉았고, 동행했던 일반 여행객들 말고도 다른 나라 사람들도 자리를 함께 한 소박하지만 의미 있는 공연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히트곡 ‘4월 밤공기’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그녀가 같이 출연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오기 전부터 즐겨 들어서 익숙한 노래였다. 처음 만들 때는 세월호와 무관했지만 막상 듣고 보면 세월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노래였다. 세월호를 떠올리게 하는 가수 R의 설명에 난데없이 촬영에 열중하던 B 감독님과 O 작가님이 먼저 훌쩍이기 시작했다. 분명 따뜻한 가슴을 가진 분들이다. 쉽게 울지 않는 아내도 훌쩍이고 있었다. 웃음만 전염되는 것이 아니다. 그 밤의 분위기는 감정에 취하기 딱 좋았고 아이들을 키우는 아빠는 그 아이들이 내 아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갱년기를 앞둔 중년의 아재가 아니라 가슴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흘려야 할 눈물이었다.
가수 R의 두 번째 노래는 관객들의 귀에 익숙한 태양의 후예 주제가 You are my everything이었다. 빛이 밝지 않은 상태에서 멍한 상태로 노래를 듣다 보니 어느새 아내와 나는 1994년 9월 영화 태백산맥이 상영되고 있는 단성사 안에 있었다. 아내와 본격적으로 사귀기 한 달 전이었는데 나는 그녀의 손을 잡을지 말지 망설이고 망설이다 결국은 잡지 못했다. 그녀의 마음을 알지 못했고 손을 잡고 나서도 잘 되지 않으면 그 어색함을 어떻게 할지 몰랐다. 그녀도 내가 손을 잡으면 어떻게 하지 하며 가슴이 설렜다고 한다. 두 사람 모두 영화의 내용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R의 노래를 들으면서 아내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따뜻한 손이 내 손을 맞이했다. 손 하나 잡는 것도 망설일 만큼 풋풋했던 그 시절을 지나 22년이 흘렀다고 생각하니 그것도 무슨 감동이라고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우리 방으로 출연자들을 초대해서 내가 만든 음식을 같이 먹었다. 인터뷰 형식으로 출연자들끼리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오갔는데 배우 H는 점점 어두워져 머지않은 때에 깜깜해질 자신의 시각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당연히 결혼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누군가와 결혼한다는 것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불편을 그 사람에게 떠넘기는 일이라 망설여진다고 했다. 그래도 결혼을 하고 싶은 이유는 있었다. 흐릿하지만 조금이라도 세상을 더 볼 수 있을 때 나를 닮은 아이의 모습을 담아 두고 싶고, 내가 사랑하는 가족을 한 번 더 보고 싶어 했다. 사실 그의 사연을 처음 들었을 때 내가 그의 입장이라면 어떤 기분이었을까를 잠시 생각했다. 가장 안타까운 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이었다. 짧지만 생각이 씨가 될까 두려워 망측한 생각을 금세 접어서 넣어 두고 잊고 있다가 그에게 그 말을 직접 듣자마자 봉인해제된 기억이 왈칵 몰려왔다. 진정하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직업 정신이 투철한 카메라 감독님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제발 흉하지 않게 편집되기만을 바랐다.
방송에서 오로라를 보는 사람들이 하도 잘 울길래 눈물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나도 금세 그리 될 줄 알았다. 옐로나이프에서의 마지막 날 비행기 타기 몇 시간 전 오로라 스톰이 터졌을 때 너무도 빠르고 장엄한 광경에 넋이 나가 눈물조차 흘릴 틈이 없었다. 거짓말 같은 스톰이 지나가고 하늘은 아무 일 없었던 듯 고요했다. 오로라가 지나 간 텅 빈 하늘을 보면서 그제야 오로라를 그것도 스톰을 봤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었다. 멍하니 하늘을 보면서 되살리지도 못할 오로라의 형상을 복기하다 보니 갑자기 눈물샘이 터지고 말았다. 내 옆엔 아내가 있었다. 아내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꼭 껴안았다.
“너와 함께여서 너무 좋아. 고마워. 너 아니면 내가 어떻게 이걸 볼 수 있었겠어. 다 네 덕분이야. 그냥 꼭 안고 싶었어. 사랑해.”
오로라 그게 뭐라고. 감정도 없이 무심하게 왔다가 사라진 그 오로라가 뭐라고. 과연 내가 이걸 볼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본의 아니게 나에게 오로라 여행을 양보하게 되었던 그분에게는 또 얼마나 미안했던지. 오로라만큼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오로라 스톰보다 빠르게 내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