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만드는 사람들
오로라 빌리지는 옐로나이프에서 하는 오로라 여행의 처음과 끝이다. 이름도 잘 지었고 시스템도 잘 갖추어져 있어서 원조가 되었다. 원조가 있으면 이를 추종하는 것들이 생겨나기 마련. 아마 그 아류의 이름은 Aurora Stop, Aurora Terrace, Aurora Point 같은 것들일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하루는 여행사의 협조를 얻어서 Aurora Station이라는 곳에서 촬영을 진행하게 되었다. 오로라 빌리지가 대기업이라면 오로라 스테이션은 개인사업자 수준이었다. 어딘지는 전혀 알 수 없을 만큼 한적한 곳에 내리자 단층 건물 하나와 티피 2개가 눈에 들어왔다. 티피에서 대기하며 오로라를 관측하는 오로라 빌리지와 달리 지나치게(!) 따뜻한 건물에서 대기하다가 옥상에서 관측을 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티피는 관상용에 가까워 보였다. 두 명의 직원은 친절했고 따뜻한 수프는 맛있었다. 발을 다 뻗으면 사람보다 큰 개들은 애교가 많았다. 친절한 곳. 좀 더 따뜻함이 느껴졌다. 아쉽게도 오로라 스테이션에서는 오로라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날따라 엷은 구름이 온하늘에 넓게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덕 나 그날의 오로라는 구름이 가리고 있는데도 윤곽이 보일 정도로 강해서 더 안타까웠다. 오로라가 늘 우리 곁에 있어도 보고 못 보는 것은 순전히 운에 달려 있다. 오로라를 보러 온 사람들에게는 아쉽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갖은 장비를 설치하고 오로라 스톰과 그걸 지켜보는 출연자들을 멋있게 담아낼 준비를 하고 있던 촬영팀에게는 휴식이 찾아왔다. 구름이 그들에게 준 선물이었다. 밖은 1초도 있고 싶지 않을 만큼 추웠기 때문에 따뜻한 실내 공기는 우리를 나른하게 했다. 촬영팀도 장비도 내려놓고 두텁게 중무장한 옷을 가볍게 했다. 오로라를 볼 기미가 없자 카메라는 스탠바이 상태로 두었지만 촬영팀 사람들은 더러 졸거나 출연자들과 어울려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도 뷰파인더가 아닌 그들의 맨눈으로 출연자들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며칠을 함께 했지만 정해놓은 일정을 정신없이 소화하느라 보지 못했던 촬영팀 한 사람 한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뚝뚝해 보였던 촬영감독님과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진 것도 그때부터였다.
영화배우 황정민이 ‘너는 내 운명’으로 제26회 청룡영화제 남주연상을 받고 이런 말을 했다.
“60명 정도 되는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멋진 밥상을 차려놓아요. 그러면 저는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되는 거거든요.”
영화나 방송 촬영 현장을 제대로 구경해 본 적이 없는 나는 그 말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황정민뿐 아니라 배우들이 수상소감을 말할 때 스태프들의 이야기를 빼놓지 않는 이유를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마음을 조금 알 것 같다.
그들은 불나방을 닮았다. 실제 방송에서는 2~3초 밖에 나오지 않더라도 완성도 높은 장면 하나를 건지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이제 그 정도면 충분하다 싶은데도 포기가 없다. 기계도 오작동을 일으킬 만큼 추운데도 장비의 원활한 조작을 위해서라면 장갑도 기꺼이 벗는다. 무거운 장비를 어깨에 둘러메고 뒷걸음을 치다가 눈밭에서 뒹굴어도 장비와 영상을 먼저 걱정한다.
그들은 열정적이고 순수하다. I 감독은 존경하는 선배 B 감독의 부름을 받고 이번 촬영에 연출이 아니라 카메라맨으로 기꺼이 동행했다. 그에게 다큐멘터리 피디의 가장 좋은 점이 뭐냐고 물어보았다. 알고 싶은 주제에 대해서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깊이 있게 공부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지구 반대편으로도 서슴없이 날아간다. 북유럽 디자인에 대한 프로그램 만들었다는 그와 요리, 그릇, 디자인, 목공 등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럴 때마다 그의 눈은 옐로나이프 하늘의 별보다 더 빛났다.
메인 연출자인 B 감독님은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우상으로 통하는 분이었다. 이웃집 아저씨 같이 푸근하고 허술한 인상이었지만 큐 싸인이 들어가고 제작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때는 누구보다 날카로운 눈빛을 보여주었다. 녹색당원일만큼 자연과 환경에 관심이 많은 그는 생업도 제쳐두고 세월호 기록을 남기는 일에 자신을 던졌다. 보통 용기와 신념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오로라 여행이 끝나고부터는 방송을 볼 때 한 장면을 얻기 위해 뷰파인더 옆에서 노심초사하면서 하나라도 더 좋은 화면을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하는 제작진의 입장에서도 방송을 보기 시작했다. 열악한 제작 환경에서도 금전적 보상보다는 방송을 만드는 장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던지는 다큐멘터리 제작하시 모든 스태프들을 나는 존경하기로 했다. 방송은 한두 시간으로 슥하고 지나가고 말지만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마는 컷 하나에 목숨을 거는 그들을 만난 것은 오로라가 나에게 준 또 하나의 선물이었다.